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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돌덩이 같았던 아이들 얼굴이 꿈 품은 꽃으로 변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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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남중 기자 중앙일보

김남중의 공감 현장

탈북 청소년 돌보는 ‘하늘꿈학교’

상처 치유하고 꿈 키우는 공간 #그룹홈서 교사와 학생 함께 생활 #합주 배우며 화합과 소통 익히고 #홀몸노인 봉사 통해 공감 배워 #교사들 “아이들 돕는 일 후회 없어” #통일 대비 교육프로그램도 준비 #‘사람의 통일’ 먼저 이룬 탈북 아이들 #통일의 씨앗과 가교 역할 하게 될 것

하늘꿈학교 학생들이 임경은 대표(왼쪽 넷째) 지도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임현동 기자]

하늘꿈학교 학생들이 임경은 대표(왼쪽 넷째) 지도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임현동 기자]

‘사람의 통일’.

남한에 들어와 사는 탈북자가 3만 명을 넘었다. 이 가운데 초·중·고교와 대안학교에 다니는 탈북 청소년(중국 등 제3국 출생 포함)만 27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의 존재는 분단된 한반도의 한쪽인 남한 사회에 어떤 의미일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서로 보듬어야 할 대상이란 건 자명하다. 그걸 넘어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남한 사회 정착을 통해 먼저 ‘사람의 통일’을 이룸으로써 온전한 남북 통일의 씨앗과 가교가 될 수 있다는 거다. 15년 전 국내 최초로 문을 연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하늘꿈학교’의 믿음이자 소망이다. 공감의 힘으로 탈북 아이들의 아픔과 눈물을 치유하고 꿈을 키워주는 학교 현장을 들여다봤다.

16일 오전 10시 30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야트막한 비탈길에 둥지를 튼 하늘꿈학교. 때마침 중1부터 고3까지 전교생 69명이 참여하는 오케스트라 수업이 막 시작될 참이었다. 학년별 교실이 악기별 연습실로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간간히 어설픈 불협화음이 튀어나온다. 숙달된 고3 ‘고참’들이 졸업하고 새로 들어온 아이들이 처음 악기를 다루는 학기 초인 탓이란다. “처음엔 악보도 볼 줄 몰라 도망 다니던 아이들이 연말쯤 되면 어엿한 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외부 손님을 모시고 공연까지 해 지켜보는 사람들을 울립니다.” 송경곤 교감의 설명이다.

바이올린반 연습실이 갑자기 시끌벅적하다. 5년째 단원들과 함께 이곳 학생들을 지도하는 임경은 ‘네오필리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대표가 아리랑 연주 연습이 끝나자 김명군(18·고3)군을 앞으로 불러 세웠다. “다리들 좀 풀어. 허리는 왜 굳었어. 선생님은 바케트인데 너희들은 왜 식빵이냐. 명군이는 오늘 생일이니 크림빵 해라. 자, 모두들 명군이에게 선물 줘야지.” 임 대표가 농을 섞어 가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자 아이들이 ‘생일축하곡’ 연주를 시작했다. 좋아하면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명군이의 묘한 얼굴 표정에 아이들이 킥킥대며 웃는다.

하늘꿈학교의 ‘1인 1악기’ 오케스트라 수업은 건강한 여가 차원을 넘어 탈북 청소년들의 닫힌 내면을 치유하는 인성교육의 일환이다. 화합과 소통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이날 난생 처음 감동적인 생일 선물을 받았다는 명군이는 “처음엔 일도(하나도) 몰랐던 바이올린을 1년 넘게 연습하고 합주를 하면서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까. 원어민 영어교사와도 허물없이 함께 지내며 영어에 흥미를 갖게 된 명군이는 내년에 대학에 진학해 ‘국제 관계’를 공부할 계획이다. “외교관이나 통역사가 되는 게 꿈입니다. 그래서 통일에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하늘꿈학교 전경. [임현동 기자]

하늘꿈학교 전경. [임현동 기자]

하늘꿈학교 학생들치고 사연 없는 아이가 있을까. 남한에 오기까지의 과정에서 겪은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을 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이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조금씩 상처를 딛고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내친김에 최지현(16·중3)양, 이태용(20·고3)군, 김소연(가명·27·고3)씨 세 사람 얘기를 한자리에서 들어봤다.

지현이는 탈북한 엄마와 중국에서 지내다 10년 전 남한에 왔다. 오자마자 일반 초등학교에 들어간 게 문제였다. “중국을 떠나기 전에 한국어 공부를 하긴 했지만 말이 서툴렀어요. 쟤는 이상한 데서 왔다며 아이들이 놀리고 왕따를 시켰어요.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억울하기만 했습니다.” 공부에 집중을 못하다 보니 학습 기초가 제대로 잡힐 리 없었다. 하늘꿈학교에 오고 나서야 비로소 바로 잡을 수 있게 됐다.

지현이는 이곳에서 목소리가 이쁘고 노래를 잘하는 아이로 꼽힌다. 가수가 꿈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수의 꿈을 갖게 된 계기가 한편으론 안쓰럽다. “초등학교 때 받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노래로 풀었어요. 그러다 보니 목이 자주 쉬곤 했는데 아이돌 가수들은 목이 안 쉬는 게 신기했어요. 연예인을 열심히 관찰하게 되면서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남한에 온 지 7년째인 태용이도 중국에서 자란 탓에 한국말이 서툴러 고초를 겪은 경우다. 몸짓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지금 그의 꿈은 디자이너다. “이 학교에서 같이 생활하는 형들이 내 대화용 그림을 보고 소질이 있다고 칭찬해 줬어요. 그것이 계기가 돼 그림에 계속 관심을 갖고 꾸준히 그리게 됐어요. 대학에 가서 산업디자인이나 시각디자인을 전공해 제품 디자이너가 될 겁니다.”

북한에서 초등학교 과정도 마치지 못한 소연씨는 19살 때 탈북해 중국에 3년간 머물며 온갖 고생을 했다. 5년 전 남한으로 와서도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부터 찾아야 했다.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사람을 아래로 보는 시선과 선입견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한 사회에 적응하려면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검정고시를 거쳐 2년 전 이 학교 학생이 됐다. 지금은 대학생이 되는 꿈을 품고 있다. “대학에서 뷰티 분야를 전공해 미용 전문가가 되려구요. 이런 기술을 제대로 배울 기회를 접하기 어려운 북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학생과 식사 중인 임향자 교장. [임현동 기자]

학생과 식사 중인 임향자 교장. [임현동 기자]

하늘꿈학교 학생들이 ‘치유와 꿈’을 얘기할 수 있게 된 동력은 무엇일까. 그 밑바닥엔 이 학교 교사 19명의 헌신이 깔려 있다. 이들은 박봉에다 그룹홈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부모나 형·언니 역할을 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는다. 대학을 마치자마자 이 학교에 자원한 10년차 강윤희(34) 교사. 그는 “같은 민족인데 우리가 누리는 것을 못 누리는 북한 사람들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다가 이 길을 선택했다.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됐고, 그들을 돕는 일에 일생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강 교사는 4~7명의 탈북 아이들과 가정을 이뤄 함께 생활하는 그룹홈 기숙사에선 언니이자 엄마였다. “교실에서 보는 아이와 집에서 보는 아이는 완전 다릅니다. 집에선 아쉽고 힘든 얘기를 솔직하게 다 풀어내지요. 마음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교사들 입장에서도 북한을 이해하고 북한 아이들을 이해하는 공감의 장이고요.”

연극반 동아리 활동 모습. [임현동 기자]

연극반 동아리 활동 모습. [임현동 기자]

이런 강 교사 눈에 비친 탈북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까. “학교에 처음 올 때 돌덩이 같은 아이들 얼굴이 꽃으로 변해요. 자존감이 커지고 꿈을 갖게 되니까요.” 그에겐 졸업생들이 자주 찾아온다. “대학 성적 올랐다고 자랑하러 성적표 들고 올 때가 많아요. 워킹홀리데이 간다며 인사하러 오고, 결혼해 애 낳았다며 오고 그러죠.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애들이 와서는 이 학교 다닐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해요.”

강 교사는 이런 교육 체험을 바탕으로 ‘통일교육’을 연구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탈북 학생들과 24시간 함께 생활하고 교육하면서 얻은 성과를 일반화해 통일 후 북한 동포들에게 적용할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곳 교사들이 ‘통일교육의 리더’가 되는 구상도 한다. 강 교사의 통일교육 연구를 돕고 있는 졸업생 인턴 한수진(가명·28)씨의 꿈도 그렇다. 사범대 수학교육과에 진학한 한씨는 “북한 교육은 너무 낙후돼 있다. 통일 후 내가 뭘 할까를 고민한 결과가 바로 교사가 돼 북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늘꿈학교가 탈북 청소년의 정착을 돕는 차원을 넘어 ‘통일 대비 학교’ 역할을 하는 것은 학교를 설립한 임향자(62) 교장의 신념이 작용한 결과다. 그는 “탈북한 아이들이 남한에서의 혼란을 극복하고 소통과 공감 능력을 익히면 ‘소외자’가 아니라 ‘남과 북의 화해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임 교장과 얘기를 나눴다.

탈북한 아이들을 위한 첫 대안학교인데 어떻게 만들게 됐나.
“90년대 말 중국에서 한 목사님을 도와 탈북 꽃제비 30명을 돌보는 일을 했다. 연민의 정에서였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고맙다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같은 민족인데 왜 이렇게 다르지’ ‘관계는 돼야 하는데 왜 이렇게 냉정하지’. 그런 걸 익힐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탓이겠구나 싶었다. ‘하나원’ 원장에게 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어 가르치겠다고 제안했다. 2003년 학교 문을 열었다.”
탈북 아이들에게 맞춤한 교육의 방향을 어떻게 잡았나.
“누구도 가본 길이 아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도 많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결핍’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통하고 공감하면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정서적인 안정과 정체성을 찾는 데 중점을 뒀다. 본의 아니게 전인교육이 됐다. 그룹홈 기숙사도 그런 맥락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홀몸노인 등 남한의 어려운 사람에게 봉사하는 경험을 통해 공감을 배우도록 했다. 마음의 동력을 찾아주는 게 중요했다. 탈북 아이들은 강인하다. 동력만 주어지면 해낸다.”
말썽 피우거나 힘들게 한 아이들은 없었나.
“말썽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사건 수준의 일이 벌어진 때도 있었다.(웃음)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도 했다. 처음엔 남자 아이들에게 위협감을 느낄 정도의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선생님이 웃으며 대해도 가식이라며 경계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왜 힘들어하는지 속내를 이해하게 되면서 마음이 더 아프고 더 인내하며 끌어안게 되더라. 그냥 참는 게 아니라 얘네는 잘될 거야라는 소망을 갖고 ‘사랑의 수고’를 하게 된다.”
앞으로의 소망은.
“탈북 아이들은 두고 온 고향의 흙냄새조차도 그립다고 한다. 이들을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 잘 가르쳐 통일의 가교 역할을 하도록 안내하는 게 일관된 소망이다. 탈북 아이들이 여기 왔다는 것은 우리가 북한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란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 북한 체제의 급변 상황이 오거나 통일이 됐을 때 남과 북을 모두 경험한 이 아이들이 완충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탈북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과 자료를 일반화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통일 후 안정되고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학교에 머무는 한나절 동안 여느 일반학교를 둘러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탈북 청소년들은 조금 다르게 살아왔을 뿐 결코 남한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 가슴 깊은 곳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와 아픔이 남아 있을 터이지만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꿈 품은 꽃들’로 보였다. 하늘꿈학교는 공감의 끈으로 사람의 통일을 엮어가는 ‘먼저 온 통일’의 현장이었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