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결혼한 독신」의 가슴앓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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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김민정씨(47·서울강남구압구정동)는 요즘 잠을 못잔다. 도대체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체의 사장인 남편, E여대에 들어간 딸을 두었으니 세상에 남부러울 것도 없다.
게다가 작년엔 비위 맞추기가 까다롭기 이를데 없는 시어머니도 돌아가셔서 마음고생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도 자신은 늘 허전하다.
『너무나 심심해서 남편을 졸라 의상대리점을 열었지요. 장사도 잘돼 주위에서 오히려 놀랄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하기는 마찬가지예요.』불면증에 시달리던 김씨는 끝내 정신과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허경순씨(42·서울강남구역삼동)도 비슷한 케이스. 『세상 살 맛이 안나요. 너무 재미가 없어요. 남들이 좋다는 수영도 하고, 골프도 쳐보고, 서예공부도 해봤지만 그때 뿐 입니다. 사우나나 골프를 매일 할 수도 없잖아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긴 허씨는 아이의 정서장애 치료를 받았던 심리치료센터를 찾아가 현재 6개월째 치료를 받고 있다.
최근 들어 정신과 병원이나 심리치료센터에 이같은 무력감을 호소해오는 주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작년9월 문을 연 한국임상심리치료센터의 경우 약8개월간에 다녀간 환자만도 1백여 명을 헤아릴 정도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중·상류충 주부들에게 심화되고 있는「무력증」은 30대 후반∼40대에 특히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관계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남편은 업무에 바빠 아내를 돌볼 겨를이 없고 자녀들은 국교에 입학하기가 무섭게 어미의 품을 떠나려한다.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주부들은 가정 밖에서 무엇인가를 얻어보려고 애쓰지만 소비·향락문화에만 길들여질뿐 자신에 대한 존재가치 인정을 주위로부터 얻어내기 어렵다.
결국 무엇을 해도 재미없고 세상살이가 시들해지는 상태에 빠지게되고 이것이 식욕부진·불면증같은 병증세까지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주부들이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은 「결혼한 독신생활」이라는데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결혼·부부등에 대한 의미의 재정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
한국임상심리치료센터 이진우원장은 부부라고 해서 너무 강하게 상대방에게 소속되려하거나 상대방을 소속시키려는 생각을 버리고 「가까운 이웃」으로 의식 전환을 시켜야 하며 「가정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내가 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내가 배우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등을 생각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하도록 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김복기씨(54·서울강남구 서초동)는 주부의 입장에서 『공적인 모임에 부부를 함께 초청하는등 남편의 지위에 상응하는 부인의 대접이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로 뿌리내려진다면 자신의 존재가치에 회의를 느끼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홍은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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