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조작된 '헛것' 이미지를 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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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여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소위 '미녀 응원단'은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실린 현수막을 떼어낸 사건이다. 버스를 타고 가던 북한 응원단이 길거리에 김정일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차를 세우게 하고는 수십명의 북한 여학생들이 뛰어가고, 그 뒤를 따라 경비를 맡던 전경 총각들도 덩달아 뛰어가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장군님'의 사진이 저렇게 길바닥에 걸려 있다가 비를 맞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의 태도를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 눈물 글썽이는 北 미녀 응원단

분명 웃음이 터져 나오는 코미디 요소가 다분하지만 동시에 섬뜩한 생각이 엄습했다. 예전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해방을 맞은 후 여러 충격적인 사건들을 접하셨던 어머니는 가끔 당시의 여러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선전하는 벽보가 사방에 붙었다. 당연히 거기에는 김일성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벽보 사진 중의 하나를 누군가가 훼손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진 속의 눈을 도려낸 것이다. 철저한 조사 끝에 잡아낸 범인은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기어이 그 어린아이를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정일의 사진이 실린 현수막을 차마 접지도 못하고 거기에 우산을 씌우고 눈물을 흘리면서 걸어가는 북한 여학생들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당시의 그 사건이 실제로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죄는 신성모독죄였을 것이다.

내가 교실에서 가르치던 내용들이 생각난다. 프랑스의 국왕은 왜 국왕인가. 그가 무력이 강하기 때문일까. 부유하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그가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낱 인간 세계의 강력한 지배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상(地上) 대리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쳐서 통치하는 존재인 것이다. 국왕이 대관식을 할 때 렝스(Reims)의 교회에 가서 '하늘에서 날라 온' 기름을 가지고 도유식(塗油式)을 하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다.

백성에게 국왕의 신성함을 과시하는 가장 좋은 기회는 국왕의 행차다. 국왕은 병을 치유하는 신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국왕 행차 시에는 국왕의 몸을 만지려고 수많은 군중이 운집했다.

이 사람들 모두 국왕의 몸을 만지게 할 수는 없으므로, 간접적으로 국왕의 손길이 닿은 물건 역시 신성한 힘을 띤다는 구실로 국왕이 손으로 주무른 동전을 군중에게 던져주었다.

이런 의식이 단지 저 먼 중세의 일일까. 프랑스에서 국왕이 동전을 던지는 수작을 가장 대규모로 벌인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의 의식이 그리 빨리 진보하는 것 같지도 않다.

*** 北의 변화에 조급한 판단 말길

북한의 지배 체제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제가 작용해서, 지배자의 카리스마와 그 이미지 조작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듯하다. 북한의 미녀 응원단은 북한의 그런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남북한은 정말 다른 사회체제로 진화해 가서 둘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하는 염원만으로 통일이 오지는 않으며 오랜 기간 동안의 준비가 필요하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경험하는 이 낯설음 자체를 더 겪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기대하는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너무 조급한 판단이다. 냉전시대처럼 무장공비와 북파공작원이 오가는 것보다 운동선수와 가수들이 오고가는 것이 그래도 훨씬 낫지 않은가.

그러는 가운데 남북한 모두 헛된 이미지가 깨지리라고 기대해 보자. 이미지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한번 금이 가면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지는 약하디 약한 '헛것'이기 때문이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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