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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입증 어려운데 형량만 2배 상향" 정부 성폭력 대책 실효성 있을까

중앙일보

입력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오후 서울 명동 YWCA회관 앞에서 한국YWCA연합회원들이 미투 운동 동참을 뜻하는 검정, 보라색 의상과 스카프, 장미를 손에 들고 '3.8 여성의 날 기념 미투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YWCA 행진'을 하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오후 서울 명동 YWCA회관 앞에서 한국YWCA연합회원들이 미투 운동 동참을 뜻하는 검정, 보라색 의상과 스카프, 장미를 손에 들고 '3.8 여성의 날 기념 미투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YWCA 행진'을 하고 있다.

8일 정부가 발표한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ㆍ성폭력 근절대책’에는 ‘미투’(Me Tooㆍ나도 당했다) 운동 이후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대안이 담겼다. 하지만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기존에 있던 정책을 보여주기식으로 망라해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란 지적이 제기됐다.

이날 발표된 대책의 골자는 권력형 성폭력 사범에 대한 처벌 강화다. 업무상 자신의 보호ㆍ감독하에 있는 사람에 대해 위계ㆍ위력으로 간음한 경우 현행 최대 징역 5년에서 10년으로, 추행은 징역 2년 이하에서 5년 이하로 법정형이 올라간다. 공소시효도 현행 7년에서 10년으로, 현행 5년에서 7년으로 자동 연장된다. 이를 위해 법무부는 올해 내로 형법과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을 개정할 계획이다. 범정부 협의회 민간 위원인 이선경 변호사는 “양형 기준이 상향되면 검찰의 구형도 높아지고 선고도 높아진다. 사회적으로 죄의 무게를 형량에 비추어 보는 경향이 있는 만큼 바람직한 변화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하지만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운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특성상 형량만 올려봐야 실제 처벌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왔다. 서지현 검사의 대리인을 맡았던 김재련 변호사는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폭력은 폭행이나 협박이 동반되지 않더라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서 이뤄졌다면 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려워 가해자가 부인하면 진실게임 양상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 대책에는 정부가 직접 피해자의 익명 신고를 받아 대응하는 방안도 담겼다. 고용노동부는 이날 홈페이지에 직장 내 성희롱 익명 신고 창구를 개설했다. 이성기 고용부 차관은 “피해자가 익명 신고를 하면 행정지도에 착수하고, 근로감독관을 파견해 피해자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소속 회사에 대한 예방 차원의 지도 감독을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정하경주 소장은 “근로감독관 인력이 너무 부족해 기존 업무만으로도 버겁다. 실제 현장에 나가더라도 익명 신고를 근거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고용부에 따르면 전국 190만개 사업장을 관리하는 근로감독관은 1200여명에 불과하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가운데)이 8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을 정부 합동으로 발표하고 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가운데)이 8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을 정부 합동으로 발표하고 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대책도 담겼다. 피해자가 두려움 없이 피해를 공개할 수 있도록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경우 수사과정에서 위법성 조각사유(형법 310조 ’진실한 사실로서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를 적극적으로 적용하기로 했다. 일부 가해자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나 무고죄를 악용해 피해자들이 제대로 진술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온라인 상의 악성 댓글에 대해서도 피해자의 고소ㆍ고발 없이 수사하고 처벌한다. 민갑룡 경찰청 차장은 “경찰청 사이버수사과가 상시 모니터링하고 악의적이고 심각한 댓글의 경우 가해자의 IP를 추적해서 사법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정부는 ‘미투’ 운동이 집중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문화예술 분야에 대해 성폭력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국가인권위ㆍ문체부ㆍ민간전문가로 구성된 ‘특별조사단’을 꾸린다. 문체부는 오는 12일부터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 신고ㆍ상담센터를 100일간 운영한다. 센터를 통해 피해자 상담과 민ㆍ형사 소송 지원 등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또 성폭력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에 대해 정부 보조금 등 공적 지원을 원천 배제할 방침이다.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를 맡은 이성미 시인은 “신고-조사-징계성 조처를 하는 상시 시스템이 필요한데 특별조사단과 신고센터 모두 한시적인 조직에 불과하다”며 “문화예술계 30인 이상 사업장을 근로감독 대상에 포함한다는데, 문화예술계엔 30인 이상 사업장이 별로 없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느낌”이라고 꼬집었다.

처벌 강화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근본적인 대책은 부족하다는 평가도 나왔다.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처벌 강화 위주로 가다 보니 남성 가해자들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교육 등이 부족하다.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실태 조사도 필요하다”면서 “앞으로 대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여성가족부에 다른 부처들이 얼마나 협력하는지가 중요하다. 여가부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인 만큼 각 부처가 힘을 지속해서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미 시인은 “그동안 정부에 ‘좀 더 늦더라도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이번 대책에는 많은 것을 담았지만, 실제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스더ㆍ정종훈ㆍ홍상지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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