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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35만원 수입, 1000만원 빚 떠안고 여관에서 생활하는 70대, 빚 탕감 신청 결과 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장기소액연체자의 빚 탕감 지원을 위한 신청 접수를 받고 있는 서울 광진구의 광진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 허정원 기자

장기소액연체자의 빚 탕감 지원을 위한 신청 접수를 받고 있는 서울 광진구의 광진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 허정원 기자

“신용이 회복되면 이제 일을 시작하려고요.”

[수습기자 현장 리포트] #빚 탕감 신청 장기 연체자 만나보니 #10년이상 1000만원 이하 연체자 대상 #1000만원 원금이 4000만원 된 40대 #소득없는 중장년이 대부분 연체해 #서류때문에 고령자들 두세번 발걸음도 #8월 말까지 지원센터 등에서 접수 받아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광진구 광진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 장기소액연체자들을 위한 채권 매입을 신청하고 나오던 김정민(70·가명) 씨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금 100% 탕감이란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던 그는 “빚이 있으니까 자존감이 떨어졌다”며 “이제 접수가 됐으니 결과를 지켜봐야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제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듯, 구비서류 목록이 적힌 종이를 북북 찢어버렸다.

약 119만 명에 달하는 장기소액연체자의 채무 탕감을 위한 신청 접수가 지난달 26일 시작됐다. 지원 대상자는 10년 이상, 1000만원 이하의 장기소액연체자 중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8월 말까지 6개월간 캠코 지역본부·지부(26개) 또는 전국 42개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 접수가 가능하다. 인터넷은 온크레딧(www.oncredit.or.kr)을 통해 할 수 있다.

10년 동안 1000만원을 못 갚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이들은 빚을 완전히 탕감해준다는 정책에 어떤 기대를 갖고 있을까. 접수가 시작된 지 삼 일째인 지난달 28일, 현장에 찾아가 목소리를 들어봤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소득 없는 중장년층이 대다수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 중앙센터의 권다혜 사원은 “신청하는 분은 주로 상환능력이 어렵고 소득 없는 중장년층”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신청 삼 일째라 그런지 신청자 수는 하루 10명 남짓인데, 오늘은 좀 더 많이 오셨다”며 “임대차주택에 무상거주하거나 가족에게 의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권 씨는 어떻게 신청자의 사연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까. 그는 “재산세 증빙이나 소득 증빙 등 서류를 요구하면 먼저 자기 사연을 털어놓는 고객들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광진센터에서 만난 김종호 씨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 사연을 털어놨다. 그는 커피를 사겠다는 제안을 한사코 거부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더는 누군가에 빚을 지기 싫다는 눈치였다. 2000원에 2+1 행사를 하는 자양강장제를 건네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 씨는 10년 넘게 월 35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노령연금 20만원에다가 주변 지인들이 모아 준 15만원 정도가 한 달 생활비다. 현재는 여관에서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커지는 빚부담.

커지는 빚부담.

빚을 지게 된 과거를 회상했다.
“부산에서 처의 작은 아버지가 시작한 자영업을 물려받았다. 아내 명의로 된 사업이었는데 처가 가족들이 공동으로 하는 사업이었고 나는 종업원이었다.”

잠시 말을 머뭇거리던 그는 “그런데 점점 나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고 아내는 내 명의로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빚을 많이 졌다. 결국 부도가 난 뒤 1200만원의 빚을 내가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며 신용불량자(금융채무불이행자) 신세가 된 계기를 털어놨다. 김 씨의 아내는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해 왔다고 한다.

배드뱅크 제안이나 언론을 보고 찾아와

김 씨는 “상록수와 희망모아에서 안내를 받고 여기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상록수는 새마을금고가, 희망모아는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운영하는 배드뱅크다. 배드뱅크란 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이나 채권을 사들여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기관이다.

센터에서 만난 또 다른 신청자인 김학철(46·가명) 씨는 인터넷에서 직접 찾아보고 이곳을 찾았다. 그는 "병원비 때문에 신용카드 빚을 많이 졌다. 아플 때는 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빚을 졌는데 생활이 어려워지며 갚지 못하게 됐다"고 신청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추심업체의 빚 독촉에 시달려왔다고 했다. 그는 “이자가 너무 많이 불어서 이제는 갚을 엄두가 안 난다. 직업도 일정치 않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원금이 1000만원이 채 되지 않던 빚에 이자와 연체이자가 붙으면서 현재는 원리금이 4000만원으로 불어나 있다고 했다.

장기소액연체자 구제를 위한 신용회복지원 신청접수를 시작한 2월 26일 서울 강남구 한국자산관리공사 서울지역본부에 장기소액연체자 재기지원 접수를 알리는 입간판이 설치돼있다. [뉴스1]

장기소액연체자 구제를 위한 신용회복지원 신청접수를 시작한 2월 26일 서울 강남구 한국자산관리공사 서울지역본부에 장기소액연체자 재기지원 접수를 알리는 입간판이 설치돼있다. [뉴스1]

까다로운 서류절차로 두세 번 발걸음

신청자들은 공통으로 접수하려면 여러 번 방문해야 하는 절차가 힘들고 까다롭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고령자들이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 신청인은 “어제 두 번이나 오고 오늘 마지막으로 와서 절차를 마무리했다. 구비해야 할 서류 목록을 적어줬는데 깨알 같아서 잘 읽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인터넷 접수도 가능하지만 고령 신청자들이 이용하긴 어렵다. 복잡한 접수 서류에 대해 꼼꼼한 안내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접수 시 필요한 서류는 한 번에 다 챙기기 어려울 정도로 종류가 많다. 본인확인을 위한 신분증, 재산 소유 확인을 위한 최근 1년 지방세 세목별 과세증명서, 소득금액증명원 및 사실 증명 등 소득 증빙자료, 금융자산내역, 임차보증금 유무(임대차계약서 사본·무상거주확인원), 최근 3년 출입국사실증명서 등이다.

캠코 측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신청 접수 건수는 2월 26~27일 기준 총 607명(채권계좌 기준 1953건), 상담 건수는 4328건이다.

상담 중 73%에 해당하는 3154건은 필요서류 등 제도에 관한 문의였다. 캠코 관계자는 “신문광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통해 몰라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취약계층이 없도록 홍보할 예정”이라며 “향후 접수가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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