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국가 R&D, 민간 기피 분야에 과감히 투자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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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윤의준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윤의준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지난 연말 한국 과학기술계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다. 진통 끝에 국가재정법이 개정돼,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시행하게 됐다. 과학기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과학이 진일보할 전기가 마련됐다고 생각한다.

그간 한국은 정부 R&D를 통해 과학·기술·산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선진국들이 오랫동안 축적해 온 과학과 기술을 짧은 시간에, 그리고 경제발전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경제발전의 수단으로서 ‘과학기술’이라는 한국적 개념이 정립되면서, 이제는 오히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실정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 R&D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에서 경제성 분석을 필수로 삼는 관행이다. “기초과학과 원천기술개발이 중요하다. 빠른 추종자에서 모험적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과학기술은 투입된 재정 대비 경제적 성과가 숫자로 제시돼야 수행될 길이 열린다.

그런 점에서 지난 1월 과기정통부의 R&D 예비타당성조사 개선방안에 거는 기대가 크다. 연구개발사업에 대해 과거 SOC 등 건설사업과 같이 평가해 온 관행을 타파하고 과학기술적 타당성에 주안점을 둔다면, 국가 R&D사업의 본질적 요소를 제대로 짚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조사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겠다는 방안도 R&D 사업의 적시성을 높여 혁신성장을 촉진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과학기술 R&D는 민간에서 수행하기 어려운 영역, 정부만 할 수 있고 정부가 꼭 해야 하는 미래 영역에 대한 투자여야 한다. 인력양성, 모험적 선행기술 R&D, 인프라 및 생태계 구축, 시험 및 인증 등이 그 대상이다. 이에 과기정통부로 넘어온 예비타당성 조사 업무와 관련하여 몇 가지 바램을 적어본다.

첫째, 정부가 국가 R&D에 대한 국민적 이해와 신뢰 구축에 보다 노력을 기울이기를 바란다. 기재부에서 받은 권한을 제대로 사용해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엄중한 잣대로 예산투입 대상을 선별하고, 정부가 지원해야 할 대상과 하지 말아야 할 대상을 분별해주기를 바란다.

둘째,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의 축소다. 실익이 없는 사업에 대해 굳이 조사를 하는 것은 행정력의 낭비다.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은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는 것이 낫다. 다만, 과학기술혁신본부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대한 제도적 보완 조치를 해 둬야 한다.

셋째, 이번 기회를 국가 R&D 제도 개혁을 위한 시발점으로 삼기 바란다. 예비타당성 조사는 전체 제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향후 제도개선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창의와 혁신 잠재력을 키울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소망해본다.

윤의준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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