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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철도시발지'가 어딘지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서울역이겠죠. 지금도 일제강점기 때 사용했던 녹색 지붕 건물 그대로 남아있잖아요.” (50대 박정훈씨)
“잘 모르겠어요. 경인선이 최초라는 것은 알고 있는데 무슨 역인지는…”(30대 김세준씨)

“우리나라 최초의 열차 운행이 시작된 역이 어디인지 아시느냐"는 질문에 지난달 말 서울 노량진역 앞에서 만난 시민들은 이렇게 답했다.

정답은 ‘노량진역’이다. 1899년 9월 노량진역에서 인천역으로 오가는 열차가 달리기 시작한 것이 우리 철도 역사의 시발점이다. 시민들은 “전혀 몰랐다.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코레일에 따르면 1897년 3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 철도가 착공됐다. 부설권을 받았던 미국인 모스는 공사 자금이 부족해지자 이를 일본에 팔았고, 1899년 4월 23일 일본에 의한 철도 기공식이 열렸다. 9월 18일에는 첫 열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76년이 지난 1975년 9월 18일 당시 철도청은 김종필 국무총리의 휘호와 서정주 시인의 비문을 새긴 ‘철도 시발지(鐵道始發地) 기념비’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기념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념비는 사람이 갈 수 없는 철로 옆에 있다.

노량진역에서 철로를 따라 300m 정도를 걸으면 철도 시발지 기념비가 나온다. 정용환 기자

노량진역에서 철로를 따라 300m 정도를 걸으면 철도 시발지 기념비가 나온다. 정용환 기자

지난달 22일 기념비를 직접 보기 위해 역 관계자와 동행했다. 안전모와 형광 조끼를 입고서야 코레일과 노량진역사의 협조를 구할 수 있었다. 노량진역에서 300m 정도를 걸어가자 4m가 넘는 커다란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옆으론 열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1호선 하행선로와 급행선로 사이였다. ‘한국철도공사 지정 철도 문화재’라는 글귀와 함께 서정주 시인이 쓴 비문이 보였다.

1975년 9월 18일 철도청이 세운 철도 시발지 기념비. 정용환 기자

1975년 9월 18일 철도청이 세운 철도 시발지 기념비. 정용환 기자

안전모와 형광 조끼 없이 기념비를 보려면 노량진역 뒤편에 있는 ‘수산시장 고가도로’에서 내려다봐야 한다. 하지만 50m 정도 떨어진 이곳에서도 기념비가 무엇인지 알아보기는 힘들다. 한 시민은 “KTX와 새마을호 등 다양한 열차들이 노량진역을 지나지만 어떤 것도 지금은 정차하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철도 시발지 기념비가 소외된 현재 노량진역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노량진역 뒤편의 고가도로에서 내려다 본 철도 시발지 기념비(가운데). 정용환 기자

노량진역 뒤편의 고가도로에서 내려다 본 철도 시발지 기념비(가운데). 정용환 기자

기념비가 외딴 철길 옆에 세워진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은 “1975년에 기념비를 세우면서 그 위치가 적당하다고 본 것 같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논의가 몇 번 있기는 했는데 실행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동작구청 관계자는 “장기적으로는 노량진역 철도 시발지 기념비를 관광 상품화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노들섬 개발이 끝나면 사육신공원과 노량진역 철도 시발지 기념비를 하나의 관광코스로 묶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서정주 시인이 쓴 철도시발지 기념비문

1899년 9월 18일 철도 역사의 장이 열리고 
경인간 33.2㎞의 철로가 뚫린 그날로부터 76주년  
철마라 불리우던 증기시대를 거쳐 디젤기관이 철길을 누비더니   
이어 전철의 막이 휘날리며 철도가 반석 위에 오른   
오늘을 못내 그날의 감격을 함께 되새기며   
유서깊은 철도 효시의 요람지 여기 한강 마루에   
이 기념비를 세워 기려 새 모습의 철도를 기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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