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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 밝혔다고 명예훼손 역고소 … 폭행·협박 없었다고 강간 무혐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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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투, 이제 시작이다 <상>

여성문화예술연합에서 활동하는 신희주 영화감독은 2015년 온라인상에서 데이트 폭력 피해자의 글을 공유하고 가해자의 실명을 거론했다가 가해자로부터 두 차례 명예훼손 고소를 당했다. 신 감독은 “불기소 처분을 받긴 했지만 1년3개월 동안 피의자로 조사를 받으며 정신적 압박 때문에 우울증 약을 복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피해자 두 번 울리는 허술한 법 #유엔, 한국 명예훼손법 수정 권고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목소리도

성범죄 피해자들의 증언을 무력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 법 조항이 있다.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형법)이다. 현행법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거나 정보통신망을 통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징역이나 금고,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성폭력 고발자들은 반대로 고소를 당하기 일쑤다.

중앙일보에 직장 내 성추행을 제보한 한 20대 여성은 “최근 변호사로부터 ‘회사 특징을 자세히 밝히면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역고소가 무서워 가해자의 이름을 숨기고 한 ‘반쪽’ 미투는 파장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2015년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상담을 해보면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성폭력 피해자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경우가 많다”며 “이를 폐지하고 공익적 목적이 아닌 사실 적시 명예훼손은 민사소송을 통해 손해를 보전하든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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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을 ‘폭행이나 협박’이 있는 경우만 한정해 해석하는 형법도 문제로 지적된다. 최근 연기자 지망생 A씨는 드라마 외주제작사 대표로부터 노래방에서 성폭행당해 경찰에 고소했지만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단순한 ‘비동의 간음’은 피의자를 처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 드린다”는 문자를 받았다. 사건은 결국 무혐의 처리됐다. 지난달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회의에서 루스 핼퍼린 카다리 부의장은 “한국은 강간을 너무 엄격하게 정의하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국과 영국 등처럼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우리나라 민사적 손해배상은 ▶재산상 손해를 보전해 주는 배상과 ▶그 외 손해를 고려한 위자료로 나뉜다. 재산 손해의 보전을 위한 배상은 ‘노동력’만을 중심으로 평가해 낮게 책정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김재련 변호사는 “민사 위자료는 강간의 경우 5000만∼1억원 정도로 성범죄 피해자가 평생 받을 고통을 고려할 때 지나치게 낮다”고 말했다. 또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고액의 배상을 하도록 하면 불법 행위의 가능성을 줄이는 동시에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지영·노진호·홍지유 기자·김환영 지식전문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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