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 고건 벌써 텃밭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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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 정계 개편 신호탄=격돌의 한가운데에 강현욱(열린우리당) 전북지사가 있다. 강 지사는 기자에게 "탈당을 포함해 나의 정치적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며 "이르면 내일 중으로 모든 결심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탈당 선언을 예고한 것이다.

강 지사는 이날 오후 전주에서 고 전 총리를 만난 뒤 바로 군산으로 이동해 정 의장을 면담했다. 고 전 총리를 만난 뒤 "5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총리와는 공직 생활을 오래도록 같이 해 생각이 비슷하고 흉금을 터놓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로 정치적 자문을 구했다"고 한 강 지사는 정 의장을 만난 뒤엔 "접점을 찾지 못했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강 지사의 탈당은 호남 정계 개편의 신호탄이다. 5.31 지방선거 재선을 노리는 강 지사에겐 '정동영계'로 분류되는 김완주 전 전주시장이 도전장을 냈다. 김완주씨는 정 의장의 전주고 6년 선배다.

강 지사는 이른바 '불법 당원 모집 의혹'의 배후로 김완주씨 쪽을 지목하며 이런 불공정 문제가 시정되지 않으면 경선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정 의장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말은 강 지사가 당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 행정형에서 정치형으로=고 전 총리는 그동안 전북 정치권의 이런 흐름을 예의주시해 왔다. 고 전 총리는 지역적 기반이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는 차기 대선 도전을 결심한 이래 고향인 전북을 자신의 안정적인 표밭으로 만들 구상을 해왔다. 이른바 '집토끼'가 필요한 것이다. 정 의장 측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미묘한 상황에 강현욱 지사를 만나 '행정가 고건'이 '대선 정치인 고건'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줬다.

고 전 총리 측과 교감해 온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고 전 총리는 '탈당한 강현욱 후보'를 도와 전북지사 재선을 성공시킨 뒤 그 여세로 전남의 민주당, 충청권의 국민중심당을 통합하는 주인공이 되려 한다"고 말했다.

정 의장 쪽은 어떤가. 그는 싸움을 회피하지 않는다. '고건 문제 정면돌파→열린우리당 중심의 호남.충청권 장악'의 길로 바로 나간다는 계획이다. 그에게 지방선거는 일종의 도박이다. 정치적 명운이 걸렸다. 이해찬 총리의 사퇴는 사실상 그가 주도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불쾌감을 주면서까지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총리 사퇴 불가피론'을 폈다.

만약 선거에 패한다면 대선 경쟁구도에 먹구름이 낄 게 뻔하다. 어차피 막다른 골목이고 피할 수도 없다. 죽기살기로 지방선거에 다 걸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 의장과 고 전 총리의 조기 격돌은 이래서 벌어졌다.

◆ "전북에 효도하겠다"=이날 두 사람의 설전도 치열했다. 정 의장이 주재한 전주 당 간부회의에서 주승용(여수을) 의원은 고 전 총리를 거명하며 "호랑이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지만 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도 좋아한다. 하이에나는 항상 상대방의 약점만 있으면 상처 난 부분을 공격하는 짐승"이라고 했다. 고 전 총리가 강 지사를 만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정 의장은 군산대 강연에서 "열린우리당은 전북과 특수관계다.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전북에 효도하고 자부심을 돌려 드리겠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고 전 총리는 전북대 강연에서 "총리 시절 새만금의 미래가치를 어떻게 높일 것인지 연구하도록 독려했다"며 "자랑스러운 전북도민"을 강조했다.

이정민 기자, 전주=장대석.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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