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있는이야기마을] 졸리는 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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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달려와 한 말이다. 그 이상한 게 다음날엔 조금 더 자랐고, 며칠 후엔 줄기에 잎이 세 개나 붙었다고 했다. 오후가 되면 햇볕이 따가운지 잎을 오그리며 잠을 잔다고도 했다. "'졸리는 풀'이라고 이름을 지어줄까?" 하며 묻기도 했다. 만날 보고를 하는 것이 제법 신경을 쓰고 있는 듯했다.

새 학기가 되어 아이가 반장 감투를 쓰는 바람에 교실에 갖다 놓으라고 사 준 군자란이었다. 교실 창가에 둔 화분을 아이는 매일 물을 주며 길렀다.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 꽃이 피려 한다, 소식도 전해줬다. 그 이상한 게 여러 개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날 아이에게 말했다.

"내일 뽑아와."

짧고 가는 뿌리를 가진 식물을 아이는 휴지에 싸서 조심스레 가져왔다.

"잡초인가보다."

그래도 버리지는 않고 책갈피에 넣어 잘 말렸다. 여린 잎은 바싹 말라 바스러질 것 같았다. 투명 테이프로 양쪽을 붙여 코팅을 하고 다시 종이에 붙였다. '1992년 4월 해니'. 밑에 이렇게 썼다. 이게 지금 우리 집 식탁 유리 밑에 있다.

아이는 이제 자라서 숙녀가 되었다. 그동안 이사를 여러 번 다녔다. 짐을 자주 싸다 보니 허섭스레기는 버리는 게 습관이 되었는데도 유독 늘어나는 것이 화분이다. 어디를 가면 색다른 화초를 보물인 양 가져오고 화원 앞을 지나치지 못하는 버릇도 있지만, 식물이 새끼를 치면 잘라 버리지 못하고 새 화분에 옮기는 게 가장 큰 원인이다.

강화도에 갔을 때 '풍로초'를 몇 뿌리 사왔다. 큰 화분에 옮겨 심었는데, 꽃을 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꽃이 피던 날, 모처럼 눈여겨 화분을 들여다보니 오래전 아이가 말했던 '이상한 게' 함께 자라고 있었다. 아예 화분을 하나 마련해 옮겨 심었다. 연두색으로 얼마 있더니 녹색으로 변한 잎이 화분을 가득 채워 참으로 예쁜 모양새를 갖췄다. 여느 이름 있는 꽃 화분 못지않았다. 또 노란색의 작은 꽃이 앙증맞게 피고 마침내 씨앗을 터뜨려 베란다 곳곳에 까만 모래알같이 퍼져 있었다.

다시 3월이 되었다. 겨우내 잘 자라지 않았던 게 다시 키를 쑥 키웠다. 베란다 쪽 빛이 잘 드는 곳에 있어선지 희한하게 오후만 되면 아이 말처럼 햇볕이 따가워 '졸리는 풀'이 된다. 나는 혼잣말을 하며 슬며시 웃었다. 풀이 춘곤증을 앓네!

서명희(49.주부.경기도 과천시 원문동)

◆ 31일자 소재는 '봄나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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