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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재민의 퍼스펙티브

전례없는 미·중 통상압박···한국 '만만한 나라' 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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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만만하게 보이면 미·중 통상 압박 잇따른다

수년간 미국의 수입제한조치와 #중국의 막무가내 사드 보복에도 #한국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통상에서 만만한 국가 인식 심어 #미국과의 통상문제 해결하려면 #최고위급이 진정한 소통 나서서 #한국에 대한 전례없는 통상압박이 #미 국익에 반한다는 점 설득하고 #WTO 협정 따른 절차 병행해야

흔히 하는 오해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하며 한국에 대한 압박도 강화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미국이 취하는 조치들의 골격은 2013~2015년 모습을 갖추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다. 트럼프 시대를 맞아 그런 기제가 본격 가동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현재 상황을 트럼프 개인의 성향이나 현재 미 정부의 입장만으로 보고 이에 대응하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지난 1여년간 우리의 스텝이 꼬인 것은 이런 잘못된 시각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미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보호무역주의와 대한(對韓) 압박을 여과 없이 드러낸 트럼프의 당선 이후에도 이를 선거용 멘트나 트럼프의 개인적 특이성 정도로 치부하곤 했다. 설마 동맹국을 그렇게 몰아붙이겠느냐는 안이한 생각에 빠져 미국 내 흐름이 바뀌는 상황을 읽지 못했다.

지난 1월 22일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모듈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의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에 2월 16일에는 한국 등 12개국 철강제품에 대해 미 통상법 232조에 따른 수입규제조치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이들 국가 철강제품에 53%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계획이다.

미국의 전례 없는 무역 규제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16년 만의 세이프가드가 사실상 한국을 주 대상으로 하는 것도 불편하지만 ‘국가 안보’를 이유로 처음 발동하는 수입규제조치에 한국이 포함된 것도 황망하다. 이 조치를 검토한 미 상무부가 심의과정에서 미 국방부와 논의했다고 밝힌 것도 당황스럽다. 한국을 제외한 11개국은 중국·러시아·인도·브라질·코스타리카·이집트·말레이시아·남아공·태국·터키·베트남이다.

11개국의 면면을 보면 누구도 한국만큼 밀접하게 미국과 안보 동맹관계를 구축하고 있지 않다. 70년의 혈맹으로 2만8000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핵 위기에 직면한 한국을 다름 아닌 ‘안보’를 이유로 한 수입규제조치 대상에 포함한 것은 이상하다. 정말 안보가 이유라면 한국과의 교역에 혜택을 부여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들 새로운 조치 외에도 한국 상품은 미국으로부터 이미 여러 형태의 수입규제조치에 직면해 있다. 2013~2017년 미국이 개시한 반덤핑 조사 78건 중 21건이 한국 상품 대상이다. 동일한 시기 중국 상품을 대상으로는 한 조사는 44건이었다. 2017년 기준 중국의 대미 수출액이 우리보다 6배 정도 크니 단순 비교하면 한국이 중국보다 3배 정도 높은 빈도로 미국에서 반덤핑 제소를 당하는 셈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나. 먼저 한국은 ‘비중 있는’, 그러나 ‘만만한’ 국가로 비치고 있다. 2017년 우리나라는 미국의 6대 교역국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국가에 비해 부담이 덜 한 국가다. 우리를 앞서는 5개 국가는 중국·캐나다·멕시코·일본·독일이다. 영국이 우리 뒤이다.

그러니 새로운 실험적 조치를 취할 때 한국을 포함하는 것은 여러모로 유리하다. 중국을 목표로 한 조치라는 색깔을 희석하기 좋다. 또 우리 경제 규모가 선진국도 후진국도 아닌지라 시범 케이스로 여러모로 적합하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2013~2015년 불법 어업 규제 대상국에 한국을 포함한 것이나, EU가 지난 12월 역외 조세회피국에 우리를 포함한 것도(최근 해제) 이런 맥락이다. 여러 이유가 언급되고 있으나 기저에는 우리를 바라보는 이런 시각이 깔렸다. 중국과 일본을 겨냥하는 환율조작국 리스트에 한국이 함께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 무역 보복에도 WTO 제소 안 해

우리는 그간 통상문제에 너무 무심했다. 우리 정치구조가, 의사결정 체제가 통상에는 둔감했다. 여러 쟁점을 둘러싼 국내 이해관계 다툼에 진력했지, 세계 질서가 어떻게 바뀌는지 읽지 못했다. 그러니 돌이켜 보면 바쁘긴 바빴는데 실속이 없었다. 주요 교역국의 동향 파악이나 이들과의 교역 리스크 관리에 실패한 것이다. 눈을 떠보니 이제 새로운 흐름이다.

통상문제에 대한 소극적 대응 역시 문제를 키웠다. 수년간 미국의 수입규제조치에 직면하고도 세계무역기구(WTO) 패널에 회부하는 데 조심스러웠다. 지난해 중국으로부터 전방위 교역 제한조치를 당하고도 WTO 패널로 진행하지 않았다. 중국발 교역 제한조치와 관련, 이 정도 조치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었던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할 것이다. 통상 협정상 임계점이 넘었음에도 정해진 절차와 규칙에 따른 대응을 취하지 않으면 다른 조치로 이어진다. 다른 국가들이 이를 보고 뒤를 따른다. 이런 상황들이 통상문제에 관한 한 우리를 만만한 국가로 바라보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엉킨 실타래를 풀 것인가. 제일 중요한 것은 통상문제를 전략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통상문제를 ‘수출 진흥’ 정책으로 단순하게 바라봤다. 이를 기업의 현안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호떡집에 불난 것’같이 움직인다.

미 통상 규제 극복할 방안 찾아야

수입규제조치가 부과될 때마다 일회성 항의가 이어지다 잠잠해진다. 미국의 통상 규제를 ‘우려’하고 ‘비판’만 하였지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고민은 부족했다. 다른 나라가 부담을 느끼지 않으니 만만한 상대에 머무른다. 입체적 판단과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며, 우리가 가진 카드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둘째, 선택과 집중이다. 전략적 방향이 정해지면 제한된 인력과 자원을 효과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7대 교역국이다. 우리 기업들은 전 세계 196개국과 교역한다. 얼마나 통상 관련 현안이 많겠는가. 이 모든 현안에 역량을 집중하고 모든 국가와 FTA 체결을 위해 노력하다가는 정작 중요한 통상 현안의 파악과 대응을 담당할 인력과 자원은 얼마 남지 않는다. 최근 상황은 단순히 FTA 체결로 ‘경제 영토’를 확장한다는 것이 사상누각에 그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제한된 자원과 인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셋째, 통상 인프라 강화가 시급하다. 그 핵심은 전문인력 양성과 유지다. 현재 통상교섭본부 165명가량의 인력은 우리에게 던져진 수많은 난제를 헤쳐 나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세계 7대 교역국으로는 단출하기 그지없는 인력과 조직이다. 얼마 되지 않은 인력마저 일부는 세종시에, 일부는 서울에, 일부는 KTX에 있다. 이런 구조로는 제대로 된 대응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통상에 사활을 거는 국가로서는 너무나 용감한 결정이다.

최고위급 소통으로 통상문제 풀어야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현안들을 바라보자. 상황이 급박할수록 차분히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준비 안 된 섣부른 대응은 화를 초래하기 쉽다. 특히 국가 관계에서 감정적 대응은 가장 경계해야 할 패착(敗着) 중의 패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과 진정한 소통이다. 두 나라 최고위급이 통상문제를 얼마나 깊이 있게 논의했는지 의문이다. ‘양국 교역 증대’ ‘호혜적 정신’ ‘경제 파트너’ 같은 수사적 언급 말고 진정한 대화를 했는가 하는 점이다. 속내를 밝히고 잘못된 정보나 오해가 있었다면 이를 풀어야 한다. 실권 없는 실무자가 이런 문제를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제자리걸음이다. 지금 논의되는 미 통상법 232조에 따른 안보 관련 수입제한조치 문제는 최고위급의 진정성 있는 대화만이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안보 관련 수입제한조치에 대해 우리도 안보 측면에서 입장을 전해야 한다. 통상문제에서 미국이 한국을 중국의 ‘사이드킥(sidekick·아류)’처럼 간주하는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러다간 한국 내 역풍이 만만치 않을 수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경제제재, 남한은 통상제재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는가.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한 한·미·일 안보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현시점에 분명 잘못된 시그널이다. 이런 점을 적극 부각해야 한다. 이는 오로지 최고위급 대화에서만 전해질 수 있는 메시지이다.

분쟁 해결 위한 WTO·FTA 절차 밟아야

그다음으로 철저한 준비를 거쳐 WTO 협정과 FTA 협정에 따른 절차를 밟아야 한다. 협정상 협의 절차와 분쟁해결절차를 적극 발동해야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분쟁해결절차의 실효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잘못된 기준이다. 중요한 통상 쟁점이 있음에도 이를 공식절차에 회부하지 않으면 주변국들은 궁금해한다. 그러니 최종 결과만큼이나 한국이 이러 이러한 대응조치를 신속히 취한다는 신호가 중요하다.

특히 이런 문제를 공식화하고 다른 국가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는 WTO 패널 절차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그 절차가 비효과적이라면 오늘까지 539건이나 되는 분쟁이 그 절차로 회부된 상황을 설명하기 힘들다. 이 중 미국은 지금까지 모두 250건 (제소 115건, 피제소 135건)의 WTO 분쟁에 참여했다.

때마침 2월 22일 공개된 일본과의 수산물 분쟁 패널보고서에서 우리측 패소가 결정됐다. 이에 대해 우리가 우려하며 대응을 고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절차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는 방증이다.

앞으로 미국과 솔직한 대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사항은 통상협정의 관련 절차에 따를 필요가 있다. WTO 제소를 선전할 필요도, 숨길 이유도 없다. ‘결연히’ 대응할 필요도 없다. 담담하게 협정상의 권리를 그대로 행사하는 것이다. 중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외과적 수술과 함께 식이요법 및 섭생의 조절을 통한 체질 개선이 중요하다. 통상협정의 분쟁해결절차는 후자에 가깝다. 이를 통한 제도 개선의 장점은 무시할 수 없다. 바쁠수록 원칙에 충실하자.

지금이 고비다. 몰려오는 보호무역주의의 파고를 이겨내고, 4차 산업혁명이 선도하는 새로운 교역체제에 안착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도약할 것이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리셋 코리아 통상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