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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대문 활짝 연 과학, 발견의 기쁨 가득하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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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과학 단행본

과학 단행본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지음, 동아시아

과학 단행본·잡지 르네상스 #번역 위주 벗어나 국내 저작 활기 #사회의학·양자역학 등 쉽게 풀어 #문과·이과 구분 의미 없어 #날마다 새로운 지식 나오는 시대 #한정된 독자층 넓히는 게 숙제

수학의 수학
김민형·김태경 지음, 은행나무

불멸의 꿈
류형돈 지음, 이음

김상욱의 양자 공부
김상욱 지음, 사이언스북스

세상물정의 물리학
김범준 지음, 동아시아

윤성빈은 이름도 생소한 ‘스켈레톤’이라는 썰매를 탄다. 아이언맨 헬멧을 쓰고 얼음 계곡을 질주해 금메달을 땄다. 여자 컬링 팀은 이번 올림픽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렇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때마다,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리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화제에 오른다. 책도 그렇다. 최근에 각광을 받는다고 소문난 과학책 분야도 새로운 분야를 열고 있다.

지난해 여러 곳에서 ‘올해의 과학책’으로 선정한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사회의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소개했다. 상처 입은 사람이 많은 탓에 ‘사회가 건강해야 사람들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큰 울림을 줬다. 새로움과 놀라움이 적절한 사회적 맥락 속에 놓일 때, 화제의 책이나 베스트셀러가 된다. 과학은 계속해서 갱신되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있고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분야가 많기 때문에 과학책은 ‘새로움’ 측면에서 유리한 출판 거점을 확보했다.

갈릴레오가 『대화』를, 코페르니쿠스가 『회전에 관하여』를 썼을 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새로운 발견이 줄짓고 있다. 이 중에 어떤 것은 인간의 수명을 무한히 연장할지도 모르고, 인류의 우주 식민지 건설을 가능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일반인들이 과학책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현대 과학의 발견은 대부분 전문잡지에 실려 발표된다. 전문가를 위한 학술 잡지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내는 출판사의 매출은 3조 5000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이 출판사는 일반 독자를 상대하지 않는다. 전문가의 논문이 실린 잡지들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전 세계 대학과 도서관에 팔아 매출을 올린다. 다시 말해 일반인들은 현대 과학의 성과물이 실린 전문잡지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렵다. 눈 밝은 기자나 해설가들이 등장해 설명을 해 주지 않으면 ‘새로움’을 접할 기회가 일반인들에게는 봉쇄돼 있다.

과학책 출판에 힘을 쏟은 전파과학사, 범양사 출판부, 사이언스북스, 승산, 궁리 같은 출판사들이 과학 고전을 공급했다. 진지한 고전들이 바탕이 되어서 그랬는지, 시대적 상황 때문에 그랬는지, 1970년대, 80년대에는 가치와 철학적 측면을 무겁게 사유하는 진지한 과학 독자들이 많았다. 수십 년째, 부동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제외하면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한 것은 별로 없다. 이 정도의 책들도 일반인들에겐 여전히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2월 ‘블랙 브랜트 9호’ 발사 장면. 과학에 무병장수, 우주 식민지 개척의 길이 있다. [사진 NASA]

지난해 2월 ‘블랙 브랜트 9호’ 발사 장면. 과학에 무병장수, 우주 식민지 개척의 길이 있다. [사진 NASA]

요즘 눈에 띄게 과학책 출간이 활발해졌다. 『수학의 수학』을 쓴 김민형, 『불멸의 꿈』의 류형돈, 『양자공부』의 김상욱, 『세상물정의 물리학』의 김범준 같이 자기 분야의 이야기를 묵직하게 풀어 낼 수 있는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분야를 넘나들면서 과학 연구를 일반인들에게 전달하는 최재천, 정재승 등의 스타 저자들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과학자들이 과감하게 대중들에게 발언을 하도록 옆에서 힘을 실어 주면서 과학책의 새로운 출판 경향을 만들어가는 출판사들로 바다출판사, 동아시아, 반니 등이 눈에 띈다.

과학책은 정말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을까. 공급 측면에서 보면 이전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통의 강자들 이외에도 새로이 과학책 출판에 뛰어든 출판사들이 많다. 이제는 인문 단행본 전문 출판사들이 과학책을 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다. 잡지계에서는 대표적인 대중 과학잡지인 ‘과학동아’ 외에도 상당한 숫자의 정기구독자를 확보한 ‘스켑틱’, 실제로 만들 수 있는 장치를 통해 원리를 알려주는 ‘메이커스’, 과학 비평을 하겠다는 ‘에피’ 같은 과학 잡지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시장은 늘어난 과학책을 모두 수용하기지 못하고 버거워하고 있다. 출간 시점에서는 베스트셀러 10위권에 들었던 책들도 1000권 남짓 팔리고 마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가끔 폭넓은 독자들의 관심을 받아서 수만 권 이상의 매출을 보이는 책들이 없지는 않지만, 과학책 판매는 대부분 기대 이하다.

과학책 독자의 숫자는 정체됐고 분야마다 고를 책이 늘어나니 개별 책의 판매는 떨어진다. 과학을 여전히 어려워하는 독자가 많아 독자층을 넓힐 과학책이 한정돼 있다는 점도 걱정스럽다. 지금 쏟아지는 다양한 과학책을 소화할 독자층이 형성되려면 과학 자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야 할 텐데, 문과라서 죄송한 ‘문송’시대에도 여전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과학 출판의 토대가 튼튼한 점은 희망적이다. 고전과 번역, 국내 저작물들이 균형 있게 준비돼 있고 그 세례를 받은 세대가 자라고 있다. 그 속도가 느려서 막 뛰어든 출판사들은 어려운 시간을 견뎌야 하겠지만 그들이 고르고 준비한 책의 독자들이 성장하고 있다.

주일우 과학잡지 ‘에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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