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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은 히틀러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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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수정 정치국제담당

김수정 정치국제담당

지난 12일 오후 강릉 관동하키센터.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과 스웨덴전 휴식 시간, 6000여 관중들 사이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관중석의 외국인 커플이 프러포즈하는 모습이 전광판에 소개되면서다. 관중석의 열기와 달리 ‘동작 멈춤’모드로 맞춰진 무리가 있었다. 빨간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일사불란하게 응원하던 북한 응원단이다. 지인이 경직된 그들의 사진을 첨부해 현장에서 보낸 메시지는 “사전 입력된 프로그램이 없어서인 듯. 슬프다”였다. 북한 응원단의 모습에서 우리가 느낀 건 3대 세습 폐쇄 독재 60년을 통해 형성된 이질감, 안타까움이다.

북핵미사일 목표 한반도 재통일이란 워싱턴 목소리 #천안함 주범 보낸 평화공세 본질 못보면 안보 암흑

대규모 응원단과 혈육 김여정의 평창 파견을 통해 ‘핵을 보유한 착한 이웃으로 보이려는’(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차관보) 매력공세를 한 북한 김정은이 폐막식엔 천안함 폭침의 주범 김영철 통전부장까지 보낸다고 했다. 한국의 안보 전선까지 흔드는 총공세다. 북한이 2017년 말까지 핵·미사일 개발을 완료하고, 본격 평화공세에 나설 것이라던 전문가들의 예견은 적중했다. 지난해 미사일 도발이 한창일 때도 대화의 문을 열어두고 예견된 시점에 김정은의 신년사로 화답 받은 문재인 정부는 김여정 등 북한 대표단을 환대했다. 북한의 입장에 맞춰 핵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말이다.

워싱턴에서 북한의 실체, 본질에 대한 담론이 커지고 있다. 북한의 폭압 체제,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개발의 궁극적 목적을 두고서다. 방점은 북한의 “한반도 재통일”시도에 있다. 김여정이 남북 정상회담 카드를 던지고 간 이후 미 수뇌부의 언급은 더 잦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실패한 공산체체 아래의 재통일을 추구하고 있다”(해리 해리스 태평양사령관) “한·미동맹을 끝장내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장기 전략적 야욕 수단”(댄 코츠 국가정보국장) “자신의 권력 하에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마이크 폼페오 중앙정보국장) 등이다.

그들이 왜 이런 얘기를 할까.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은 “한국의 집권당과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해석한다. 한국 정부가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비핵화가 목표’라고 하지만, 핵 동결로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려는 것 아닌가, 대외 정책의 전략적 중심축을 남북관계에 두고 북한 핵보유의 시간만 벌어주는 게아닌가 하는 경계의 목소리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 뒤 CNN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으로 부터 체제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고,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면서 대미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것일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 등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인식이기도 하다. 청와대의 대북 정책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남한을 겨냥한 게 아니고, 우리가 잘해주면 북한도 변할 것이란 선의를 전제로 깔고 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2차대전 초기 전시내각의 총리로 영국을 대 나치 항전으로 이끈 윈스턴 처칠의 이야기를 담았다. 처칠은 내각을 맡은 뒤에도 히틀러와 ‘뮌헨협정’을 체결하면 평화가 온다고 주장하던 이들의 공격을 받는다. 그 정적들이 인정한 게 있다. 히틀러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평화를 얘기하고 독일의 재건 지도자로 위장할 때 처칠은 “본질을 제대로 봤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세계는 처칠이 히틀러의 실체를 직시한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얼마전까지 무수한 도발로 우리 국민의 목숨을 앗아간 주범의 방한을 남북 관계 개선 의지라며 환영했다. 지금 기류라면 사과 한마디 요구하지 않을 듯 하다. 국민의 목숨을 지키는 국가지도자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만약 핵을 보유한 북한이 서해 5도를 점령할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 응원단과 김여정이 보낸 웃음, 김영철이 들고 올 메시지에 눈과 귀를 뺏겨선 안된다. 핵보유 진입국가 북한의 실체를 놓쳐선 우리 후세대의 미래는 암흑이다.

김수정 정치국제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