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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ㆍ전처 못 믿겠다” …이혼 부부가 은행 찾는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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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9살 아들을 둔 A씨는 B씨와 3년 전 협의 이혼했다. 양육권은 전처인 B씨에게 넘겼다. 매달 50만원의 양육비를 지급하고 매주 아들을 만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A씨가 재혼하게 되면서 고민이 생겼다. 매달 송금하던 양육비를 B씨에게 한꺼번에 주고 양육비 문제를 마무리하고 싶지만 목돈을 선뜻 넘기기가 마음에 걸린다. 양육비가 아닌 다른 용도로 돈을 쓸 수 있는 데다 B씨도 재혼을 할 수 있어서다.

양육비 분쟁 막는 신탁상품 등장 #손주 줄 용돈 맡겨두는 ‘금지옥엽’ #대학 입학, 결혼 때 목돈으로 내줘 #죽은 뒤 통장 잔액 기부할 수도 #은행, 다양한 상품으로 고객 유치

이런 고민을 하던 A씨가 찾은 해결책이 지난달 KEB하나은행이 내놓은 ‘양육비 지원신탁’이다. 양육비 지급 의무자가 목돈이나 월납 형태로 돈을 맡기면 신탁에서 매달 일정 금액을 자녀에게 지급한다. 이혼한 뒤 발생하는 양육권 분쟁을 막기 위한 상품이다. 수입이 부정기적이거나 양육비 지급을 미루다 한꺼번에 정산하는 경우 등에도 활용할 수 있다.

배정식 하나은행 신탁부 팀장은 “2015년 통계에 따르면 한부모 가정 중 27%는 양육비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을 정도”라며 “안정적인 양육 환경 조성과 양육비 분쟁을 막기 위한 상품”이라고 말했다. 양육비인만큼 환매조건부채권(RP)이나 국공채 등에 투자해 원금 손실이 나지 않도록 운용한다고 덧붙였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지난해 최소 가입 금액 기준을 낮추고 월 납입금 1만원짜리 신탁 상품을 내놨던 은행권이 최근에는 더욱 다양한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최근 등장한 신탁 상품이 방점을 찍은 곳은 ‘내가 원하는 곳에 돈을 쓸 수 있도록 관리해주는 믿을 만한 관리자’다.

신탁은 금융회사를 믿고 돈이나 자산(부동산이나 주식 등)을 맡기는 것이다. 고객의 운용지시에 따라 다양한 금융상품을 이용해 돈을 굴리는 만큼 종합자산관리가 가능하다. 중금리 수준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현행법상 세제 혜택 등은 기대할 수 없지만 돈에 용처를 명기한 꼬리표를 달아 양육권이나 상속 분쟁을 피하고, 사후에 원하는 곳에 돈을 사용할 수 있다.

신한은행이 최근 출시한 ‘유언기부신탁’도 마찬가지다. 금전 자산을 신탁한 뒤 일반 통장으로 사용하다 수탁자가 사망하면 잔액을 사전에 신탁계약서에 명시한 공익단체나 학교·종교단체 등에 기부할 수 있는 상품이다. 일부 인출과 추가 입금, 해지도 가능하다.

소액 상속과 증여를 위한 상품도 나왔다. 국민은행이 지난해 말 내놓은 ‘KB금지옥엽신탁’이다. 조부모가 손주를 위해 자금을 맡기는 보급형 상속·증여 상품이다. 삼촌이나 고모(이모) 등도 가입할 수 있다. 최소가입금액은 500만원이다. 상속형은 본인이 사망했을 때 사전에 지정한 방법대로 손주에게 용돈을 지급한다. 증여형은 대학 입학이나 자동차 구입, 결혼 등 특별한 때 신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증여와 상속과 관련한 세제 혜택은 없지만 많지 않은 돈이라도 손주에게 선물처럼 남겨주고 싶은 조부모들의 문의와 가입이 많다”고 말했다.

은행이 이처럼 신탁 상품을 다변화하면서 관련 수익도 늘고 있다. 지난해 KB국민과 신한·우리·KEB하나 등 4개 은행의 지난해 신탁 수익은 8082억원으로 전년(5042억원)보다 60.2% 늘었다. 증시 호황으로 주가지수연계신탁(ELT) 잔고가 늘어난 데다 새로운 신탁 상품 등장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말 현재 4개 은행의 ELT 잔고는 24조615억원을 기록했다.

임형준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신탁 회사에 투자 판단 위임을 허용하는 등의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만 신탁 시장이 더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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