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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디트로이트를 위한 군산의 희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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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잘 먹이는 것을 정치의 으뜸으로 삼았다. 식위정수(食爲政首)라 했다. 요즘으로 치면 경제 발전, 일자리 창출, 직업 교육, 혁신 성장,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 등이 잘 먹이는 것에 해당한다. 설 연휴 시작 전날, 한국GM은 군산 자동차 공장을 시한부로 폐쇄했다. 공장은 부평, 창원, 보령에도 있다. GM 자본 전체가 이 땅에서 철수하는 불길한 상상이 자꾸 일어난다. 그럴 경우 협력업체와 연관산업까지 30만 개 일자리가 사라진다. 연휴 기간 중 평양의 핵·미사일 위협은 낮아진 대신 평창 겨울올림픽의 환호는 컸다. 군산의 한숨과 아우성은 묵직하게 내면으로 퍼져 갔다.

‘GM 공장 폐쇄’ 트럼프 계산법 #선거 의식 말고 정면승부 해야

노무현 시대인 2004년 박석무(76)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큰 정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용인(用人·인재등용)이요, 둘은 이재(理財·국부증진). …친일파를 파악하고 의문사당한 진실을 밝히는 일이 나라의 정체성과 무슨 관계가 있나”라고 일갈했다. 사람을 잘 써서 국부를 키우는 데 정치력을 집중하라는 당부였다. 적폐청산·남북정상회담에 매달리고 있는 이 정부가 새겨들을 말이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 집권세력은 경제 살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먹는 게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

지역을 잘 살게 해주겠다며 연방 수준의 지방분권 개헌을 외치는 정부지만 군산 지역의 GM 폐쇄는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결정은 적고 토론은 많은 실험 정부의 무감각·게으름 탓일 것이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총대 메는 사람도 없다. 소득 주도 성장, 최저임금 급진 인상, 부동산 감시, 탈원전 같이 완력을 쓰는 경제에 앞다퉈 나서던 이들은 다 어디 갔나. 장하성 정책실장, 김현철 경제보좌관, 홍장표 경제수석, 김수현 사회수석은 군산 문제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김동연 경제부총리에겐 문재인 대통령의 힘이 실려 있지 않고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원론만 되풀이할 뿐이다. 관념과 추상으로만 접근하고 손에 구정물을 묻혀 가며 실물경제를 다뤄본 적이 없는 이념형 참모들의 한계 아닐까.

한국GM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 20년간 한국 경제의 암덩어리로 변했다. 근로자들이 한 달에 예닐곱 날만 일하는데 80% 월급에 상여금까지 받아가는 희한한 회사가 되어 버렸다. 생산할수록 손해 보는 한국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떠나려는 GM을 붙잡기 어렵다. 이런 판에 6·13 지방선거전이 달아오른다. 집권세력은 선거 압승을 향해 질주한다. 국민 세금을 쏟아붓더라도 GM 철수만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정치 논리에 의사결정자들이 홀려선 안 된다.

군산은 국제적인 이슈로 불이 붙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 의회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군산의 GM 공장이 디트로이트로 온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GM은 디트로이트의 실업자를 살릴 것’이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디트로이트를 위해 군산을 희생시키겠다는 얘기다. 일부 외신은 “GM은 디트로이트행을 발표한 적이 없으니 트럼프의 거짓말”이라고 해설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안심할 일은 아니다. 지금은 거짓말이지만 앞으로 현실로 만들기 위해 트럼프가 GM 수뇌부를 압박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그동안 대북 정책을 갖고 우리 대통령을 시험하더니 이번엔 경제 문제에서 혹독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어제도 한국의 철강 수출을 막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럴수록 문 대통령은 식위정수를 기억해야 한다. 대북 문제에선 속도를 늦춰 시간을 벌고 경제 문제에선 정치적 고려 없이 정면승부를 거는 게 정도다. 새 살은 그렇게 돋는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