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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한국 정부, GM 다룰 실력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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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업이든 나라든 승리의 기억이 중요하다. GM은 한국 정부와의 싸움에서 늘 이겨왔다. 불패의 기억은 빠른 행동과 결정을 가능케 한다. GM이 지난 13일 군산 공장을 폐쇄하면서 달랑 하루 전에 정부에 통보한 것도, 정부의 만류 요청을 외면하고 밀어붙인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아무도 결정 안 하는 정부 #청와대가 총대 메야 할 때다

GM은 한국을 속속들이 안다. 시작부터 그랬다. 대우자동차의 전신 새한자동차를 만든 것도 GM이다. GM은 1972년 신진자동차와 50대 50으로 지분 합작해 GM코리아를 설립했다. GM코리아는 새한차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78년 대우에 인수됐다. 1992년 대우가 지분을 사들일 때까지 GM은 사실상 20년간 대우차의 지분 50%를 쥐고 있던 셈이다. 그렇게 한국을 떠났던 GM은 몇 년 뒤 외환위기로 대우가 흔들리자 때를 놓치지 않았다.

2000년 10월부터 길고 지루한 협상이 이어졌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차를 제값 받고 팔려는 정부, 가능한 헐값에 사려는 GM과의 줄다리기였다. 당시 GM의 협상 책임자 앨런 패리튼 아태지역 신규사업본부장은 한국통이었다. 새한자동차 부품 담당 매니저로 일했던 그는 한국어에 능통했고 누구보다 한국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협상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다. GM은 2년여간 협상을 주도하면서 기다렸다. 정부의 협상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시간은 GM의 편이었다. 박상배 당시 산업은행 부총재는 "GM은 한국 사정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결국 대우차가 법정관리를 통해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에 겨우 영업이익을 내자 GM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2년 전 제안했던 가격(약 50억 달러)에 크게 못 미친 14억 달러에, 폴란드 공장은 인수 대상에서 빼는 등 자신들 입맛대로 대우차를 요리해 가져갔다.

GM은 다시 우리 정부의 약한 고리를 노리고 있다. GM의 무기는 일자리다. GM이 철수하면 일자리 30만 개가 날아간다. 지방 선거를 코앞에 둔 정부가 감당할 수 있겠나. 가뜩이나 일자리 정부를 자처하는 문재인 정부 아닌가. 지난달 방한한 GM의 배리 앵글 해외사업부문 사장은 청와대 경제수석부터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산업은행 회장, 기획재정부 차관까지 모두 만나 지원을 요청했다. 배석했던 관계자는 "말이 요청이지 압박이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증자·대출·세제 혜택, 구조조정을 포함한 패키지딜을 요구했다고 한다.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지방선거를 앞둔) 굉장히 절묘한 시점에 찾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GM 측은 "누구도 책임 있는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군산 공장 폐쇄는 미적대는 정부에 '당장 (지원을) 결정하라'는 강력한 압박이다.

이제 이 정부의 실력이 드러나게 됐다. 부랴부랴 정부는 관계부처 차관 회의를 열었지만, 정답이 아니다. 당장 경제부총리 주재로 관계장관회의를 열어야 한다. 차관들로는 안 된다.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지난 정부 때 인사에 개입했다며 산업부 국장이 구속되는 판이다. 섣불리 총대를 멜 관료가 있을 리 없다. 이런 분위기에선 책임은 미루게 마련이다. GM이 노리는 게 그런 상황일 수도 있다. 그렇게 끌려가선 안 된다.

 필요하면 청와대가 나서야 한다. '밀실 야합''부실기업에 세금 퍼주기'로 몰매를 맞은 지난 정부의 서별관 회의 트라우마에 잡혀있을 때가 아니다. 서별관 회의든 동별관 회의든 열어 관계 장관들이 속내를 터놓고 끝장 토론을 벌여야 한다. 관계 장관회의의 결정은 연대 책임을 지되 대신 투명하게 기록을 남기면 된다. GM을 속속들이 읽어내는 게 먼저다. 한국GM의 회계 장부는 물론 GM의 경영 현황과 전략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봐야 한다. 한국에서 얼마를 벌어갔는지,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한국의 자동차 생산 경쟁력이 과연 낙제점인지, 강성·귀족노조가 얼마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지, 제대로 계산해내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할 수 있는 지원의 마지노선을 정할 수 있다. 그래놓고 GM과 끝장 협상을 벌여야 한다.

다음 수순은 책임자를 정해 전권을 쥐여주는 것이다. 협상 창구는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으로 단일화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산업은행은 GM의 2대 주주다. GM의 요구대로 돈을 넣는다면 산은이 해야 한다. 명분도 뚜렷하다. 게다가 이동걸은 철두철미 원칙주의자다. 국책은행이 부실기업에 뒷돈을 대다 국민 세금을 까먹는 꼴은 결코 볼 수 없다며 지난 정부 내내 각을 세웠다.

마지막 관건은 노조다. 노조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 대신 "날 강도 같은 GM 자본의 요구에 동의할 수 없다"며 전면 투쟁을 예고했다. 이 역시 GM의 계산속에 있을 것이다. 노조가 격하게 나올수록 정부의 입지는 줄어든다. GM과의 패키지딜에서 노조 요구를 많이 들어주려면 다른 쪽을 희생해야 한다. 그만큼 국민 세금이 더 들어간다는 얘기다. 귀족노조를 세금으로 지원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친노(親勞) 정부라지만 뒷감당이 어려울 것이다. GM은 GM대로 '먹튀'의 명분을 찾을 수 있다. 노조도 전략적이어야 한다. 정부와 2인3각으로 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결과는 불문가지. 또 한 번 노조와 정부, 모두 패자가 될 수 있다. GM에겐 승리의 기억을 한 번 더 안겨주게 될 것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