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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째 직접 만든 주머니 기증하는 '기부천사' 할머니

중앙일보

입력

“드르륵~ 드르륵~”. 지난 12일 오후 대전시 대덕구의 한 빌라. 현관문을 열자 재봉틀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방에서는 허우옥(84) 할머니가 재봉틀에 앉아 연신 발을 굴렀다. 재봉틀 아래에 달린 발판을 앞뒤로 굴러야 바늘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오래된 재봉틀이었다.

허우옥 할머니, 자투리 천 모아 재봉틀로 주머니 만들어 기증 #매년 3000개씩 4만개 넘어… 자식 만류에도 "즐겁다" 손사래 #할머니, 동전주머니 수백개 여학생들에게 나눠줄 계획도 세워

허우옥 할머니는 재봉틀로 주머니를 만들고 있었다. 재봉틀의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천 조각이 주머니로 변해갔다. 천을 뒤집어 지퍼를 달고 나자 어엿한 동전 주머니가 됐다. 손바닥만 한 크기부터 손가락 한 마디 크기까지 다양했다. “저렇게 작은 주머니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했다. 주머니는 모두 아름다운 가게로 보내진다. 당연히 무료 기증이다.

지난 12일 허우옥 할머니가 자투리 천을 이용해 주머니를 만들고 있다. 할머니는 주머니를 모두 무료로 기증하고 있다. 신진호 기자

지난 12일 허우옥 할머니가 자투리 천을 이용해 주머니를 만들고 있다. 할머니는 주머니를 모두 무료로 기증하고 있다. 신진호 기자

할머니가 주머니를 기증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2005년 라디오를 듣던 중 우연히 ‘아름다운 가게에서 기증품을 구한다’는 사연을 듣고 만들어뒀던 주머니를 들고 가게로 찾아갔다. 자신이 가진 작은 기술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때부터 시작한 기부가 올해로 14년째를 맞았다. 그동안 할머니가 기부한 주머니는 4만개가 넘는다. 2014년 3만개까지 센 뒤로는 따로 계산하지 않았지만 매년 3000개 이상 만들었으니 그쯤 됐을 것이라는 게 할머니의 설명이다.

허우옥 할머니가 재봉틀을 사용해 직접 만든 작은 크기의 알록달록한 주머니. 신진호 기자

허우옥 할머니가 재봉틀을 사용해 직접 만든 작은 크기의 알록달록한 주머니. 신진호 기자

주머니 재료인 천은 할머니 집에서 걸어서 40~50분 걸리는 시장의 홈패션 가게에서 구한다. 이불 등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을 구해 보따리에 싸서 가져온다. 알록달록 색동부터 연분홍·녹색 등 다양한 색깔에 천 종류도 누비와 면·폴리에스터까지 다양하다. 자투리 천이지만 새 물건에서 나온 것이다. 할머니는 “주머니를 만드는 데는 누비가 최고”라고 했다.

천을 구하는 데는 돈이 따로 들어가지 않는다. 지퍼를 사는 돈이 유일한 비용이다. 요즘은 천 구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시장에 이불 등을 주문하는 사람이 줄면서 자투리 천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다. 허 할머니는 “어디서 천만 더 주면 밤새라도 주머니를 더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허우옥 할머니가 17살때 5만환(당시 화폐)을 주고 구입한 재봉틀. 지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재봉틀에는 할머니의 손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진호 기자

허우옥 할머니가 17살때 5만환(당시 화폐)을 주고 구입한 재봉틀. 지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재봉틀에는 할머니의 손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진호 기자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 허 할머니는 해방이 되자 부모를 따라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열두살 때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할머니는 부모의 권유에 따라 공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배운 게 재봉기술이었다. 그는 열일곱살이 되던 해에 재봉틀을 샀다. 공장에서 번 돈으로 산 ‘보물 1호’였다. 그 당시 돈으로 5만환이나 주고 샀다고 한다.

허 할머니는 지금도 보물 1호를 사용한다. 벌써 68년이나 됐다. 재봉은 4년 전 고장이 나 중고물품으로 교체했지만, 나무와 철로 만든 틀은 여전히 그대로다. 재봉틀은 할머니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발을 굴러야만 작동하는 구형이지만 허 할머니는 바꿀 생각이 없다. 자식보다 더 오래 자신과 함께한, 가장 오래된 친구이기 때문이다.

허우옥 할머니가 만든 다양한 크기의 주머니들. 할머니는 주머니를 좋은 일에 써달라며 무료로 기부하고 있다. 신진호 기자

허우옥 할머니가 만든 다양한 크기의 주머니들. 할머니는 주머니를 좋은 일에 써달라며 무료로 기부하고 있다. 신진호 기자

할머니는 8년 전 작고한 할아버지와 사이에 4남매를 뒀다. “인제 그만두시라”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허 할머니는 그만둘 생각이 없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경로당에 가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손사래를 친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 바늘에 실을 꿸 만큼 시력이 좋고 자신의 재능을 기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허 할머니는 요즘 작은 동전 주머니를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다. 벌써 200~300개를 만들었다. 앞으로 200~300개 정도를 더 만들면 여학교(여중) 앞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줄 계획이다. 할머니는 “요즘 아이들이 내가 만든 주머니를 좋다고 할까? 그런데 이렇게 일일이 다 손으로 만든 주머니가 흔치 않아”라며 보따리를 풀어 보였다.

허우옥 할머니로부터 주머니를 기증받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고마움을 표시해 전달한 카드. 신진호 기자

허우옥 할머니로부터 주머니를 기증받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고마움을 표시해 전달한 카드. 신진호 기자

허우옥 할머니는 “내 나이에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며 “주변에서 주머니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대전=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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