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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이후 와해됐던 '우리법' 출신 속속 요직 복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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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김명수 대법원장.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 [연합뉴스]

사법개혁의 무거운 과제를 안고 6년 임기를 시작한 ‘김명수 사법부’가 서서히 본체를 드러내고 있다.

김영훈 인사심의관 임명 신호탄 #법원행정처·서울중앙지법 고위직 #'인권법' 등 진보성향 판사 중용 #기존 주류 민사판례연구회 퇴조 #대법관·승진 인사서 잇따라 밀려 #정권 따라 판사들 휩쓸려 대립 #성향 쏠려 공정 재판 훼손 우려

법원행정처장 전격 교체(1월25일), 행정처 축소 및 인사(2월1일), 고위법관 인사(2일) 등 연쇄 인사를 통해서다. 부장판사 이하급 평판사 인사도 곧 발표한다. ‘인적쇄신→양승태 체제 청산(사법부 블랙리스트 등)→불가역적 사법개혁’을 향한 토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야 정치권이 법원 연쇄 인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명수(59·사법연수원 15기) 대법원장의 임명 전후 상황을 보면 그의 핵심그룹이 누구인지 엿볼 수 있다. 2017년 9월12일 국회의사당 2층 회의실.

▶이용주 의원=“대법원장이 되면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끊어낼 수 있느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김명수 당시 후보자=“그 사람들이 어떤 특혜를 받을까 하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주광덕 의원=“그 연구회를 끌고가는 30~40명을 제외한 나머지 법관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답니다.”

▶김명수=“숙청이라는 표현도 쓰시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인사청문회에서 이런 말이 나온 건 그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김 대법원장은 노무현정부 시절 진보성향 법조인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이후 만들어진 국제인권법연구회 1·2대 회장도 지냈다.

인권법연구회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의 보수색이 짙어지고 관료주의가 심화되는데 반발하고,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한 곳이기도 했다.

회원 수가 480여명으로 법원내 최대 규모지만, 모두가 김 대법원장을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인권법연구회 안에서 김 대법원장과 뜻을 함께하는 핵심그룹이 누군지는 인사를 보면 퍼즐이 맞춰진다”고 말했다.

닻 올린 김명수 호

닻 올린 김명수 호

대법원장 임명 한달여 뒤인 2017년 11월 첫 인사가 단행됐다. 전국 판사 3000여명의 승진·평가 등을 총괄하는 인사총괄심의관에 김영훈(43·30기) 판사를 앉혔다. 그 역시 인권법연구회 소속이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축소·연기하려고 했던 학회 세미나에서 토론을 맡아 대법원장의 과도한 인사권을 줄이는 것이 사법개혁의 과제라고 주장한 인물이다.

이달 초 법원행정처 추가 인사가 발표됐다. 총 9개 자리를 ‘인권법·우리법연구회’ 출신 법관 등으로 채웠다. 박진웅(46·31기) 공보관과 김도균(48·27기) 윤리감사기획심의관, 김용희(39·34기) 기획제1심의관 등은 ‘인권법’ 회원이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에 관여할 김흥준(57·17기) 신임 윤리감사관은 ‘우리법’ 회장 출신이다. ‘김명수 사법부’의 머리(기획조정실)와 입(공보관), 칼(윤리감사관)을 측근으로 채운 셈이다.

이어 고위법관 인사를 통해 ‘사법부 블랙리스트’ 민중기(59·14기) 추가조사위원장을 서울중앙지법원장에 임명했다. 여기에서도 그를 포함해 요직에 포진한 10명가량이 인권법 또는 우리법 출신이었다. 곧 있을 평판사 인사(23일자)에도 이런 흐름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현 인권법과 옛 우리법, 이 연합전선이 신 주류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보수정부에서 주요 보직을 맡으며 주목받은 ‘민사판례연구회(180여명 규모)’는 위상이 많이 달라졌다. 최근 법원행정처장 자리에서 물러난 김소영(53·19기) 대법관과 승진인사에서 빠진 이민걸(57·17기) 전 기획조정실장 등이 이곳 출신이다. 법원 주변에선 “사법부 주도권이 보수성향의 민사판례연구회에서 진보성향의 인권법연구회로 넘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법원의 최대 화두인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또한 이들의 힘겨루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김 대법원장은 그간 주류 승진코스를 밟은 인물은 아니었다. “고등부장 승진에 탈락하고 집에서 제일 먼 법원으로 전보됐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다. 한 전직 대법관은 “산보를 할 때도 기수, 연수원 성적에 따라 일렬로 걷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 판사 사회에서 김 대법원장 임명은 파격 그 자체다”고 말했다. 실제로 1970년대부터는 전·현직 대법관 중에서 대법원장을 임명해왔는데, 이 관례가 반세기 만에 깨졌다. 임명 당시 13명의 대법관 중 그보다 기수가 높은 대법관이 9명에 달할 정도로 ‘기수 파괴’이기도 했다.

갑자기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대법원장 자리에 오른 그로선 ‘인재 풀’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어렵사리 국회 문턱(찬성 160명, 반대 134명)을 넘을 때 기여한 청문회 준비단,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한 추가조사위원회에 이 두 연구회 출신 판사들이 다수 포함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역풍 불 수도=인권법·우리법연구회 중심으로 짜여지는 ‘김명수 체제’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김한규 전 서울변호사회 회장은 “이들 연구회가 실제로 이념적으로 편향된 단체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판사들이 특정 인물을 받들자고 모임을 운영하고, 그 모임 회원들이 대거 요직을 차지하는 모양새가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는 국민으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노무현정부 시절 우리법연구회 상황과 비교하기도 한다. 우리법연구회는 6·29 민주화선언 이후 노태우 정부가 전 정권의 사법부 수뇌부를 유임시키려 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88년 서울지법 소장 판사들이 주도해 만든 모임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박시환 전 대법관 등도 이 모임을 거쳐갔다. 하지만 이명박정부 들어 각종 구설수에 시달리며 세를 잃어가다 2010년 사실상 와해됐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와중에 일선 판사들이 이리저리 휩쓸리며 대립하는 모습은 국민들이 보기에 볼썽 사납다”며 “김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사법부 내홍을 조기에 가라앉히고 신뢰받은 재판으로 나아가는데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현일훈·손국희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S BOX] 조국 수석, 김형연 비서관도 김명수 사법개혁 외곽 지원

김명수 대법원장 앞에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 수습과 법원 개혁, 상고심 개선방안 도입 등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 놓여있다. 법조계에선 진보적 성향의 인사들로 구성된 법원 외곽의 이른바 ‘사법 신(新)주류’가 김 대법원장의 지원군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청와대에선 조국(52) 민정수석과 김형연(51) 법무비서관이 김 대법원장의 개혁 기조를 뒷받침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 수석은 지난해 8월 21일 청와대가 대법원장을 지명하기 전 김 대법원장에게 직접 지명 사실을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김 대법원장이 초대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로 활동했던 김 비서관은 새정부 출범 후 판사직을 던지고 청와대에 둥지를 틀었다. 김 대법원장이 서울고법 부장판사(2012~2013년)로 재직할 당시 같은 재판부 배석판사로 일한 인연도 있다.

이용구(53) 법무실장 등 법무부 인사들도 김 대법원장에겐 든든한 우군(友軍)이 될 수 있다. 특히 우리법연구회 출신인 이 실장은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사법 개혁 드라이브’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법무실장에 검사가 아닌 판사 출신 외부인사가 등용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참여연대 등 단체들도 외곽에서 사법개혁 추진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관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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