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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속으로] '여정' 'J에게' '남자는 배…' 불렀지만, 북 “예술은 혁명 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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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이슈 속으로] 16년 만에 남한서 공연한 북한 예술단 실체

삼지연관현악단이 지난 8일 강원 강릉 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삼지연관현악단이 지난 8일 강원 강릉 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이 8일 강원도 강릉아트센터 사임당 홀에서 공연하면서 북한의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북한 예술단의 방한 공연은 16년 만이다. 예술단은 오는 11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두 번째 공연을 한 뒤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김일성 정권 전부터 이념 전달 도구 #영화광 김정일, 최은희·신상옥 납치 #김정은, 서구적 요소 도입 파격 변신 #단원 어릴 때 뽑아 혹독한 훈련 #체제 나팔수지만 실력 세계 수준 #노동신문 “식량 수천만t보다 위력” #이번 공연 반미·남남갈등 유발 노려

이번 공연에서 북한은 클래식과 팝 심지어 한국 가요까지 폭넓게 펼쳤다. 한국가요로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왁스의 ‘여정’ 이선희의 ‘J에게’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거야’ 등을 불렀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생모 고용희(2004년 사망)의 애창곡이다. 김정은에겐 일종의 사모곡인 셈이다. 예술단 공연 여부와 그 내용은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하다. 체제 선전을 기획·실행하는 선전선동부 승인 과정에 정치적 메시지가 담길 수밖에 없다.

통일부가 운영하는 북한정보포털에선 북한의 문화예술 정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북한의 문예 정책은 예술성보다 당국이 지향하는 이념 전달 수단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창의를 중시하는 예술 가치는 배제되고 단순히 정치 도구로 전락하였다.”

삼지연관현악단이 지난 8일 강원 강릉 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삼지연관현악단이 지난 8일 강원 강릉 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정권 역사보다 긴 예술 선동=북한에서 예술이 이념의 도구로 쓰인 역사는 김씨 정권의 역사보다 길다. 1946년 5월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선전부 정치문화과 내에 영화반이 설치됐다. 북한의 국가 체제가 갖춰지기 전에 선전용 기록 영화를 만드는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그해 북한 최초의 영화로 여겨지는 ‘우리의 건설’이 만들어졌다.

삼지연관현악단이 지난 8일 강원 강릉 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삼지연관현악단이 지난 8일 강원 강릉 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북한의 예술은 시기별 당의 노선과 함께 움직였다. 1950년대엔 ‘천리마 운동’과 토지개혁 등을 부각하는 사회주의 건설 작품들이 주로 나왔다. 60년대 들어 사회가 안정되자 김일성 주석의 반제 항일 투쟁을 주제로 하는 ‘항일혁명투쟁’ 작품이 물밀듯 나왔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이 5대 혁명가극(피바다, 당의 참된 딸, 꽃 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과 5대 혁명연극(성황당, 혈분 만국회, 딸에게서 온 편지, 3인 1당, 경축대회)이다. 이후부터는 남한 사회의 부패상과 주한미군의 병폐,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식 행태를 비판하는 예술이 집중 제작되고 있다.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연구교수는 “북한의 예술 정치는 그 어느 나라보다 고도화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공연에서 클래식과 팝을 내세운 것 역시 표면적으론 남북화해 메시지를 보내는 척하며, ‘우리도 팝을 즐길 줄 아는 정상 국가’라는 이미지를 전파하려는 고도의 정치 선전”이라고 말했다.

◆‘독재 통치술’ 위해 한국 감독·배우 납치=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근로대중을 정치사상적으로 교화하고 온 사회를 혁명화, 노동계급화”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을 주창했다. 이를 위해 선택한 것은 영화였다. 73년 직접 ‘영화예술론’을 발표하며 김일성 주체사상에 입각한 문예이론을 영화 분야에 접목시켰다.

영화 ‘연인과 독재자’에 나오는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가운데)과 신상옥 감독(왼쪽), 배우 최은희(오른쪽). [Hellflower Film Ltd.]

영화 ‘연인과 독재자’에 나오는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가운데)과 신상옥 감독(왼쪽), 배우 최은희(오른쪽). [Hellflower Film Ltd.]

영화산업을 키우기 위해 당시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여배우 최은희와 감독 신상옥을 78년 1월과 7월 홍콩에서 잇따라 납치했다. 납치된 두 사람은 이곳에서 17편의 영화를 찍는다. 첫 작품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84년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소금’은 85년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북한 최초의 공상과학(SF) 영화 ‘불가사리’도 이때 만들어졌다. 최은희·신상옥이 86년 3월 오스트리아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할 때까지 북한 영화의 황금기가 이어졌다.

이 납치극을 2015년 책 『김정일 프로덕션』(부제:세상에서 가장 황당하고 대담한 납치극)으로 펴낸 프랑스 영화감독 폴 피셔는 “김정일에게 영화는 자신만의 독특한 ‘독재 통치술’을 연구하는 교본이었다”고 평가했다.

◆모란봉악단은 김정은 ‘친위 선전대’=2009년 셋째 아들 김정은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김 위원장은 같은 해 은하수관현악단을 만들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역시 집권 후 모란봉악단(2012년)과 청봉악단(2015년)을 잇따라 창단했다. 그는 “모란봉악단의 기본사명은 우리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 있는 무기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악단 단장이 현송월이었다.

김정은은 아버지와 달리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한복을 입고 가사를 중시하는 음악을 지향했다면, 김정은은 모든 음악 요소들을 관례에서 벗어나 대담하게 혁신했다. 그가 처음 창단한 모란봉악단은 2012년 7월 첫 공연에서 하이힐과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미국 영화 ‘록키’의 주제곡과 팝송 ‘마이웨이’를 연주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무대였다.

2012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은하수관현악단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의 합동공연. [로이터=연합뉴스]

2012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은하수관현악단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의 합동공연. [로이터=연합뉴스]

수준도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은하수관현악단은 2012년 정명훈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의 지휘로 프랑스 파리에서 라디오프랑스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합동 연주를 하기도 했는데, 당시 정 감독은 북한 악단에 대해 “기량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현송월 단장과 함께 북한 최고 명문 평양음악무용대학을 다녔던 김철웅(2001년 탈북) 서울교대 연구교수는 “북한은 5살짜리 아이부터 각종 경연을 통한 예술가 발굴을 정책적으로 행하고 있다”며 “예술을 선전도구로 삼기 때문에 혹독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아 실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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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남한 공연에 일부 단원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 모란봉악단은 현재 북한 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김정은 친위 선전대’라고 한다. 김 교수는 “모란봉악단은 북한 문예를 총괄 지휘하는 선전선동부 직할이라 예술단 중 서열이 가장 높다”고 설명했다.

북한 관영 노동신문은 지난해 5월 모란봉악단을 “몇천만t의 식량에도 비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라는 제하로 1면에 보도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에도 “우리 당 사상문화 전선의 제일 기수, 제일 나팔수들”이라며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 예술의 위력은 천만 자루의 총이나 수천t의 쌀로도 대신할 수 없다”고 극찬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예술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전통이다. 과거 북한이 ‘사회주의 제일’을 대외에 선전했다면, 지금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민족 감정을 부추겨 반미의식을 고취하고 남남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이번 공연에 내포된 선전선동”이라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S BOX] 신분 상승 사다리, 평양음대 경쟁률 8000대 1

평양음악무용대학을 다닌 김철웅 교수는 ‘음악 엘리트’ 출신이다. 북한에서 5살에 피아노를 시작해 8살에 대학에 입학했다. 김 교수는 “예술은 북한 사회에서 신분상승의 사다리”라고 말했다.

그는 “당에 의해 예술 영재로 발탁되면 명문 학교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고, 명문 음대에 입학하면 군 면제 혜택을 얻는다. 또 명문 음대를 졸업하면 거의 대부분 평양 소재 예술단에 발탁되는데, 그럼 바로 평양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의 영재발굴 시스템은 체계적이다. 문화성·교육성이 매년 전국 유치원생들을 대상으로 독창·독주 경연을 개최해 이 중에서 영재를 발굴한다. 영재를 발굴하는 기준은 현재의 실력보다는 잠재된 예술성이다. 장래의 외모와 출신 성분 등도 심사 기준이다. 이 때문에 아이의 부모 역시 심사대상이 된다. 외모 유전자를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영재로 뽑힌 아이들은 평양음대 등 명문대에 지원할 자격이 생기며, 10여 단계의 전형 중 일부를 건너뛰는 혜택도 받는다.

김 교수는 “내가 입학할 땐 9명 뽑는데 약 6000명(경쟁률 670:1)이 몰렸다. 현재는 인기가 더 높아져 경쟁률이 8000:1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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