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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고깔에 무념의 율동싣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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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춤을 추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봤다. 순수한 무아지경이라고 한다. 오로지 무념의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 거기 한순간간의 빈틈이 있을수 없고 동작의 흐트러짐도 용납 안되는 춤사위다. 한박 한박마다 춤이 꽉 차야만 한다.
한국의 춤에는 대체로 스토리가 없다. 궁중무와 제석거리·탈춤같은 특별한 예를 제외하고는 줄거리의 전개방식으로 춤을 추지 않는다. 춤이라는 언어의 재치, 그 표현자체가 곧좋은 춤의 척도다. 이른바 구성력이다.
승무는 그러한 한국 민속춤의 정수요, 백미라 일컫는다. 승무에는 민속춤 가운데 뛰어난 갗가지 춤사위가 함축되어 짜여졌기 때문이다. 연극적인 요소가 없고 즉흥적으로 신명을 불러일으키진 않지만, 그러나 볼수록 심취되고 춤의 묘미와 흥취에 젖어들게 된다. 홉사 고전음악과 고미술품을 조용히 감상하는 그런 깊은 경지의 세계다.

<자신몸짓 가져야>
즉흥적으로, 기분 내키는대로움직여서 되는 춤이 아닌 것이다. 승무의 음악은 이미 정해져 있고 춤사위 또한 짜여진 틀 안에서의 동작일 따름이다. 그 가운데서 온몸으로 수련을 쌓아자기 특유의 몸짓을 가져야 하고 관객을 매료시킬만큼 선율의 굽이굽이를 사로잡아야 한다.
짜여진 틀이란 스승이 전수해준 내용을 말한다. 무보같은 교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실기로써 전수받은 것이 누구누구라는 계보가 된다.
그리고 호흡과 율동을 일치시켜 얼마나 리듬을 갈 타느냐가 곧 작품의 완벽함이 되고 명성의 기준이 되는 것이리라.
중요 무형문화재 22호 승무의 보유자 한영숙여사(68·서울청담동)는 1930년대에 주름잡았던 경기일원의 민속음악의 대가 한성준씨의 손녀. 한씨는 당대 고수의 제1인자로서 소리판의 리더 구실을 했고 음반제작의 주선과 음악연구소의 개설및 지방순회 공연단을 조직해 돌아다니는등 전통적인 장단과 가락에 통달한 개척자였다.
한여사는 10살이 못돼(소학교 3년) 그 조부의 눈독들인 소녀로 지목돼 고향인 충남 홍성갈미를 뗘났다. 할아버지는 당시 시대적 감각에 눈뜬 국악인이었으므로 서울 익선동의 그의 연구소에서 어린 손녀에게 춤을 가르쳤다.
『당신의 대를 이르려고 처음부터 생각하셨나 봐요. 그때만 해도 무용하고자 하는 여성이 어디 있었나요. 나야 어리니깐 나가 노는 것만 좋지, 춤추고 싶었겠어요. 다리 아프고 팔이 무겁고, 그때 염불장단 하면 왜 그렇게 느린지….
그런데 할아버지 사탕발림에 하루하루 넘어갔던 게죠.』
그것이 한여사에게는 숙명이였는지 모른다. 출생부터 기구해 이복형제들 틈에서 미운 오리새끼처럼 자랐고, 할아버지의 전수자로 뽑혔지만『3천마디 뼈마디를 다 제대로 움직여 춤을 춰야 한다』는 수련과정을 참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고통이 아니었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 돌아갈 수만 있었다면 아마 중도에 스스로 탈락했으리라.
춤공부는 처음부터 시련이었다. 폐렴이 악화돼 끝내 늑골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았고, 꾀를 피우다가 종아리를 맞고 자살극을 벌이기도 했다. 싫다고 푸념하고 말썽 부리다가 광에 갇혀 동치미로 허기를 달래던 기억은 이젠 어린 시절의 어리광으로 웃어넘길만하다.
지리하고 재미없는 기본동작만으로 1년을 보내야 했다. 맨처음 마루에서 발바닥을 떼는 동작만해도 그렇다. 무릎을 굽혀 발끝을 조금 들다가 뒤꿈치부터 사뿐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 단한번의 동작에 1분이 걸릴 만큼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을 떼는지·안 떼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의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몸의 중심을 잃게 된다.
손놀림도 똑같았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동시에 손과 몸이함께 올라가고 숨을 내쉬면서몸과 손을 내리물게 된다. 그사이사이에 손끝을 뿌려 긴 장삼소매가 휘날리게 되는데 그모든 동작이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켜서 이루는 조화다.
발동작에 반년, 손놀림으로 옮겨 반년을 보낸 뒤에 비로소 기본 춤사위를 타게 했다. 그동안 싫증이 나서 주저앉아 떼를 쓰면 할아버지는 눈깔사탕 값으로 1전짜리 한닢을 손에 쥐어주곤 하였다.
춤사위가 조금씩 익혀지자 이번에는 장구·가야금·양금·해금을 다 가르치는 것이었다. 연주자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장단이 머리에 배도록 악기로써 실제 음악적 소양을 심어주는 교습방법이다. 따지고보면 그 긴 날의 발동작·손놀림의 반복을 통하여 3천마디가 다 움직여야 한다는 가르침도 박자가 몸에 배어 그 속에서 춤이 우러나게 하자는 것. 박자 안에 춤사위가 꽉 차야한다는 뜻을 이제 알만하다.
한여사가 승무로 지정받은 것은 49세 때인 1969년. 이어 71년에 학무(제4O호)의 보유자로 2중 지정되었다. 한사람에게 두가지 이상의 예능을 인정한 것은 아주 드문 예다. 그밖에도 그는 검무·태평무·바라춤·한량춤을 다 배웠는데 모두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그의 승무와 학춤은 궁중의 정재무가 아니다. 대궐안의 잔치에 추던 춤은 돗자리 한닢위에서만 움직일만큼 아주 조용하고 단조로운것이 특징인데, 한여사의 춤사위는 훨씬 폭이 넓고 독무로서도 큰 무대를 가득채운다.

<불교와 관계없어>
승무는 언뜻 사찰에서 행하는 범무를 연상케 하지만 고깔 쓰고 장삼을 입었을 뿐이지 불교와는 무관하다. 속세에는 김만중의『구운몽』을 들추거나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얘기로 줄거리를 꾸며보려 하지만 마땅지가 않다. 승무의 내력과 발전단계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것이 민간에 오랜 세월동안 형성돼왔다는 것, 어쩌면당초엔 신앙과 유관했으리라는 것, 승복은 제석의 상징일 수도있다는 것, 한말의 교방무에 들어있었는가 하면 기방과 탈판에까지 두루 번진, 그래서 한국인의 보편적인 민속무용이 됐음을 감안하지 않을수 없다.
물론 한국춤의 오랜 전통은 굿판·놀이판·기방 등에 무진장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개화이후 뜻있는 창우들에 의해 닦고 다듬어져 창작하듯 집대성된 대표적인 예가 한성준씨(1876∼1942)의 경우다. 그래서 승무자체는 각지방에 여러계보가 있지만 한씨가 맨 먼저 옛것을 약간 조정해 무대화시키는데 성공한 첫 케이스여서 정통처럼 여겨지고있는 것이다.
학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학무란 용어는 궁궐의 잔치(악학궤범)에서도 행하던 것이지만 한씨가 전수한 것이 곧 대궐의 학무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몇번이고 동물원에 가서 두루미의 생태를 직접 살피며 학춤의 걸음걸이와 날갯깃등을 다듬어 내었고 또 탈을 만들었다.
동래학무가 도포에 갓쓴 정장차림으로 추는 것과는 정반대다. 그래서 지금 한여사는 그의 학춤을 일컬어『할아버지의작품』이라고 극구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조부는 이론에 밝다든가,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예능인은 아니었다.
전통무용을 눈썰미로, 분위기로, 몸으로 익히고 가르쳤을 따름이다. 혹자는 만드는 사위, 어루는 사위, 뿌리는 사위, 앉는 사위등 춤사위마다 이름을 붙여보려 하지만 한여사는 그런것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할아버지가 하라는대로 했고, 나이 17세에 첫 발표회를 가졌을 때는 장안의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부민관(시민회관)이 터질 지경이었단다. 『몸으로 추는 것이지 무슨 이름 있어야 추나요? 이론없이도 얼마나 과학적으로 잘구성했는지 세월이 바뀐 오늘날의 감각으로도 어설픈데가없거든요』

<17세에 첫 발표회>
그대신 한여사는 승무를 장단에 따라 10과장으로 구분해 진행한다. 염불·잦은염불·허튼타령·갗은타렁·굿거리·잦은굿거리·굿거리·법고·당악·굿거리과장등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아주느린 염불장단으로 시작하여 강약을 되풀이하다가 덩더꿍이 당악장단으로 재재바르게 절정에 이르러 한숨 돌린뒤 굿거리강단으로 마감하는 것이다.
염불과장의 춤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정중동·동중정의 양면을 다 갖추고 있다. 타령과장은 자연히 발랄하고 흥겹게 마련이며 굿거리과장에서는 한국춤의 흥과멋이 한껏 배어나게 춤을 춘다.
그래서 승무만 잘 할줄 알면 다른 춤을 다 할수 있다는 지론인데, 요즘 공연에서는 1시간 가까이 걸리는 전과장을 다 해낼 계제가 못돼 번번이 몇과장의 부분만 뽑아 보이는형편이다. 한여사 자신의 건강이 그렇게 장시간 무대에 서지못하며 젊은 후진들은『천직이니까 한다』면서도 열의가 부족하다. 허리를 안구부리니 어깨도 오므라들지 않는다.『춤춰서 먹고 살수 있겠느냐』고따지다니 한여사로선 도무지 이해 안되는 얘기다.
60년을 춤에 집념으로 살아온 한평생이다. 국내는 물론 만주·일본·미국등 안 가본 데가 없고,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후계자의 양성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비록 국민학교조차 마치지 못했지만 예술학교와 대학의 강단에 서서 준엄한 스승이 되었고 예술원상이며 나라의 훈장(무궁화장) 도 받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하나 남는다. 승무를 이론화하지 못한안타까움과 민속춤의 채보작업이다. 꼬치꼬치 캐물으니 『아이그, 그만해요 그만 해. 뭐 그런걸 자꾸 물어요. 답답하게…』발을 동동 구르며 외출시간이란다. 청순한 어리과의 표정. 어려서 조부한테 떼를 쓸때도바로 그 표정이었을 것같다.
글 이종석<중앙일보출판기획위원회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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