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정책 특수’에 속앓이 하는 보험업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7면

하현옥 경제부 기자

하현옥 경제부 기자

수요는 많은 데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이 오른다. 하지만 이른바 ‘정책 특수’로 정상보다 더 가격이 올라 시장이 왜곡되는 곳이 있다. 2021년 새로운 ‘국제보험회계기준(IFRS 17)’ 도입을 앞두고 보험 부채 평가 및 결산·회계 시스템 구축과 관련한 컨설팅 분야다.

지난해 5월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가 보험 부채를 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하는 내용의 IFRS 17 기준서를 발표한 뒤 보험사는 비상이 걸렸다. 금융위원회의 계획대로면 IFRS 17은 2021년 적용된다. 보험사는 자본 확충 부담뿐만 아니라 올 연말까지 여기에 맞춘 보험부채평가와 결산·회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 숙제도 안게 됐다. 최소 2년여 시범운영을 거쳐 IFRS 17 적용에 오류가 없는지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정된 시한까지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 보험사는 마음이 급하다. 45~46개에 이르는 국내 생명보험과 손해보험사가 번호표를 들고 대기 중이다. 문제는 부족한 공급자다. IFRS 17 적용과 관련해 컨설팅할 수 있는 곳은 국내 4~5개 대형 회계법인 정도다.

컨설팅 비용은 치솟고 있다. 최근 한 보험사는 한 회계법인에서 500억원가량의 컨설팅 계획안을 받았다. 통상 200억~300억원 수준이던 컨설팅 비용이 큰 폭으로 오른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이야기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순서가 밀리면 시한에 맞춰 시스템 구축이 어려울 수 있어 주요 회계법인을 빨리 잡자는 분위기”라며 “당국이 시장 상황에 대한 이해나 대안 없이 밀어붙인 탓”이라고 말했다.

당국은 IFRS 17 도입을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만 서두르는 모습이다. 유럽연합(EU)의 IFRS 17 기준서 확정은 내년 하반기 정도에나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 주요 글로벌 보험사와 자산운용사 등도 IFRS 17의 도입 유예를 요구하고 있다. 세계 최대 재보험사인 독일 뮌헨리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필요한 테스트와 개선 일정 등을 고려하면 연기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국제 기준에 맞춘 제도 개선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국제 기준이지만 각국의 재량도 인정되는 만큼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보험사가 지는 불필요한 부담은 결국 보험 가입자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현옥 경제부 기자 hyunoc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