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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쌀국수 대신 우유 … 약하다는 선수들이 펄펄 날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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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베트남 국무총리로부터 받은 3급 노동훈장을 옆에두고 오른손을 불끈 쥔 박항서 감독. 하노이=정영재 선임기자

베트남 국무총리로부터 받은 3급 노동훈장을 옆에두고 오른손을 불끈 쥔 박항서 감독. 하노이=정영재 선임기자

“하노이 국제공항에서 시내까지 50분이면 오는데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모여드는지 5시간 걸렸어요. 카퍼레이드하는 2층버스 위에서 손 흔들어주다 감기 기운이 있어 1층에 내려가 깜빡 잠들었죠. 베트남 총리 뵙고 환영행사를 마친 뒤에 코치들과 저녁을 먹었는데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되냐. 큰일 났다’며 다들 심각해졌습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죠.”

 ‘베트남 국민 영웅’이 된 박항서(59) 감독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자신을 매끈하게 포장할 줄도 몰랐고, 속에 있는 생각을 숨기지도 않았다. 지난 주말 중국 창저우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챔피언십 결승에서 폭설 속 혈투를 벌였던 베트남 U-23 대표팀은 국민적 환영 속에 귀국했다. 우즈베키스탄에 연장 종료 1분을 남기고 결승골을 허용해 1-2로 졌지만 ‘박항서 신드롬’은 태풍급으로 발전했다.

베트남 '쌀딩크' 박항서 감독 단독 인터뷰

수상·국회의장·시장 등 잇따라 만나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베트남 국민의 대대적 환영 속에 귀국했다. [연합뉴스]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베트남 국민의 대대적 환영 속에 귀국했다. [연합뉴스]

지난 30일 박 감독이 잠시 묵고 있는 하노이 크라운플라자호텔에서 단독 인터뷰를 했다. 그는 새벽 6시부터 밤늦게까지 1시간 단위로 팬미팅, 토크쇼, 환영행사를 소화하고 있었다. 베트남 국가대표팀과 U-23 세 팀을 함께 맡고 있는 박 감독은 “인생 역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크게 내세울 게 없는 나에게 기회를 준 베트남축구협회에 보답하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할 뿐”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노동훈장 3급을 받았고 하노이 명예시민증도 받는다고 하던데.
나도 처음에는 1급이 더 좋은 건 줄 알았는데 3급이 더 높은 거라고 하더라. 훈장과 메달은 고이 간직할 거다. 어제(29일)는 베트남 국회의장님과 만찬을 했고, 오늘은 하노이 시장님 초대를 받았다.
토크쇼에서 주로 무슨 질문을 받나.
어떻게 단기간에 선수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변화시켰는지 궁금해한다. 그동안 국가대표팀을 거쳐간 다른 외국인 감독들과 비교도 하고,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도 자주 얘기한다.
베트남 국민이 친근감을 느끼는 데는 박 감독의 외모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베트남 사람들이 저만큼 인물이 못생겼다는 말인가(웃음). 내가 비주얼이 좋지 않다는 건 안다. 그보다는 선수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게 미디어를 통해 가감 없이 노출되다 보니 긍정적으로 봐 주시는 것 같다.
 박항서 감독, 강설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 [연합뉴스]

박항서 감독, 강설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 [연합뉴스]

 베트남 U-23 선수들은 8강전과 준결승에서 각각 120분 연장 승부를 펼친 뒤 승부차기 끝에 이겼다. 결승에서도 우즈벡과 120분 혈투를 치렀지만 한 발짝 더 뛰는 플레이로 상대 선수들을 질리게 했다. 이런 체력은 어디서 나온 걸까.

환영 인파로 50분갈 길 5시간 걸려 

베트남 선수들이 정말로 체력이 좋은 건가.
지난해 10월 부임해 관계자들에게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니 한결같이 ‘체력이 약하다’고 했다. 그런데 연습을 시켜보니 도대체 뭘 가지고 체력이 약하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구체적인 데이터도 없었다. 23세 이하 선수들을 대상으로 체성분 검사를 해봤더니 상체 근력이 약하고, 왼발과 오른발의 근력 편차가 심했다. 또 체지방이 너무 적다고 나왔다.

선수들 체력 약하단 선입견부터 깨 

그게 어떤 의미였나.
베트남 선수들은 체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체격이 상대적으로 작을 뿐이었다. 대신 민첩하고 스피드와 기동력이 뛰어나다. 그동안 언론에서 ‘우리는 체력이 약해 후반에 무너진다’고 자꾸 지적하는 바람에 스스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거다. 그걸 건드려서 바꿔주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짰나.
이번 대회를 앞두고 배명호 피지컬코치를 영입해 밤마다 30분씩 상체 강화 트레이닝을 했다. 또 단백질을 많이 섭취하도록 식단을 바꿨고, 아침에 쌀국수 같은 걸 먹지 말고 우유를 먹게 했다. 음식문화를 간섭하는 게 아니라 축구선수에게 정말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해야 한다고 설명해줬다. 그 뒤 연거푸 연장전을 뛸 수 있게 되자 ‘아, 우리 체력이 약한 게 아니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박항서 감독을 '나의 영웅'이라고 표현한 한 베트남 국민. [사진 유튜브 캡처]

박항서 감독을 '나의 영웅'이라고 표현한 한 베트남 국민. [사진 유튜브 캡처]

본인이 선수들에게 자극을 받은 점도 있나.
이 친구들 참 순수한 게 있다. 아침에 아이들 초롱초롱한 눈을 보면 진짜 엔도르핀이 돌았다. 진심은 얼굴에 나타나게 돼 있다. 얘들을 위해 열심히 안 할 수가 없구나 다짐하게 된다.

베트남, 선수들 통해 정신력 재발견 

귀국 비행기에서 ‘비키니 쇼’ 해프닝이 있었다. 선수들이 영웅 대접에 들떠버리는 게 아닐까.
그 행사는 나를 비롯한 선수단은 전혀 몰랐고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다. 어제 해산하면서 ‘초심을 잃지 말라’고 강조했다. 너희들과 함께해 행복했지만 8월 아시안게임(인도네시아 팔렘방) 출전 엔트리를 뽑을 때는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겠다고 했다. 하지만 난 우리 선수들을 믿는다.
결승전이 폭설 속에서 진행됐는데.
경기 이틀 전부터 눈이 많이 왔는데 세 명 빼고는 태어나서 눈을 처음 봤다며 사진 찍고 난리가 났다. 난 ‘폭설 때문에 졌다고 핑계댈 생각 말고 준비 잘하라’고 했다. 하지만 AFC가 그 경기는 연기하는 게 옳았다.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의 '박항서호' 환영인파   [연합뉴스]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의 '박항서호' 환영인파 [연합뉴스]

 박 감독에게 “한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는 축구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라고 물었다. 그는 “아무리 베트남 국민이 축구를 좋아해도 아시아 23세 대회에 이 정도로 열광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높은 분들 얘기를 들으니 감이 좀 잡혔다”고 했다.

 “유명한 장군 출신인 국회부의장이 ‘축구선수는 전사(戰士)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라. 베트남 국민은 우리 선수들의 투쟁력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 속에 숨어 있는 정신력을 재발견한 것 같다.”

하노이(베트남)=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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