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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심리부검 그 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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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남중 기자 중앙일보
김남중 논설위원

김남중 논설위원

“남편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꼭 말하고 싶어요. 이제는 당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말이죠.”

김혜정씨의 목소리는 애잔했지만 밝고 단호했다. 그는 ‘남편을 자살로 잃은 유가족’이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 앞에 단 수식어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호소 글에도 그렇게 자신을 밝혔다. 그는 한편으론 ‘자살 예방 전도사’다. 한국자살예방협회 유가족 위원으로 활동한다. 자살 사망자 유가족과 청소년, 심지어 전문가를 상대로 ‘자살 예방’에 대한 경험과 소신을 전파한다.

아픔과 죄책감에 빠져 있던 그의 변신을 이끈 건 ‘심리부검’이다. 유가족 면담을 통해 자살 원인을 찾는 절차다. 중앙심리부검센터를 자발적으로 찾아갔다.

“그날 이후 떠나지 않던 ‘왜’라는 물음 때문이었어요. 내 허물이 드러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남겨진 어린 두 아이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어요. 주변의 편견으로 아이들이 아빠와 나눴던 추억마저 부정당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심리부검과 자살 예방 역할극을 통해 극단적 선택을 한 남편을 이해하게 됐다. “미리 알았더라면 살릴 수 있었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살 예방 전도사로 나선 연유다.

그는 지난해 ‘광화문 1번가’에서 ‘국민마이크’를 잡았다. 자살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인식 개선 캠페인, 전 국민 자살예방교육 의무화, 유가족 치료 지원을 대통령에게 호소했다. 유가족과 전문가가 경험과 지식을 합쳐 생명 돌봄 가치를 확산하도록 지원해 달라고도 했다. “자살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허구를 거부합니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사회 분위기도 거부합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외쳤다.

정부가 엊그제 처음으로 범정부 ‘자살예방 국가 행동계획’을 내놓았다. 최근 5년간 자살한 7만 명을 전수 분석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유가족 면담 없이 경찰청 수사 기록만 들여다보는 ‘무늬만 심리부검’이다. 실질적인 심리부검 확산 방안은 빠져 있다. 한국에서 심리부검에 응하는 유가족은 한 해 고작 100명 남짓이다. 연간 자살 사망자 1만3000여 명의 1%에도 못 미친다. 더 아쉬운 건 이번 대책 마련 과정에 유가족 참여가 배제됐다는 점이다. “유가족도 자살을 많이 시도합니다. 그걸 이겨냈다는 것은 ‘해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김혜정씨의 안타까운 토로다.

‘누구도 자살에 내몰리지 않는 사회 실현’. 일본의 자살예방법 제1조다. 이 법은 정부도 전문가도 아닌 자살 사망자 유가족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