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블랙리스트 2라운드, 양승태 '직권남용' 김명수 '비밀침해' 결론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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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이미지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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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블랙리스트’ 사태가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22일 법원행정처 PC 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블랙리스트 ‘존재 유무’가 1라운드의 쟁점이었다면 2라운드는 관련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 지에 초점이 맞춰있다.

추가조사위 발표 뒤 관련자 법적 책임 초점 #'양승태 코트' 직권남용 혐의 수사 여부 관심 #김명수 대법원장도 '비밀침해' 고발 당해 #사법부 '자체 수습'에 일단 무게 실려

공교롭게도 같은 사안을 두고 전혀 다른 내용의 고발장이 접수돼 현재 서울중앙지검에 배당돼 있다. 양승태(70) 전 대법원장은 직권남용 혐의로, 김명수 대법원장은 비밀침해 등 혐의로 각각 고발됐다. 법원과 검찰의 관계를 고려하면 사법부의 ‘자체 수습’으로 논란이 봉합될 가능성에 일단 무게가 실린다.

‘양승태 코트’에 수사 칼날 겨눠질 가능성은

지난 9월 22일 퇴임식을 마친 뒤 차에 탑승하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김경록 기자

지난 9월 22일 퇴임식을 마친 뒤 차에 탑승하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김경록 기자

블랙리스트 의혹의 중심엔 양 전 대법원장과 당시 법원행정처 사법행정 라인이 서 있다. 앞서 지난해 5월 한 시민단체는 양 전 대법원장 등을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 중앙지검 형사1부에 배당됐다.

당초 법원 내 강성 판사들은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사 전횡이 이뤄졌다”는 입장이었다. 이날 추가조사위의 발표에 따르면 ‘블랙리스트→인사 불이익’을 입증할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법관 동향 파악, 진보 판사 모임에 대한 견제 정황 등이 담긴 문건은 여럿 발견됐다. 블랙리스트는 나오지 않았지만 혐의에 힘을 실을 만 한 증거들은 나온 셈이다. 당초 PC 개봉에 회의적이었던 일부 판사들 사이에서도 “법관 독립을 지원해야할 법원행정처가 공작 기관처럼 일했다(서울중앙지법 A판사)”는 반응이 나왔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강제 수사권을 지닌 검찰은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문제가 된 법원행정처 PC를 확보할 순 있다. 하지만 법원과 검찰의 미묘한 관계를 고려할 때 강제 수사는 검찰로서도 껄끄러울 것이라는 게 검찰 내부의 분위기다. 한 전직 형사부 검사는 “검찰이 사법부를 상대로 칼을 겨눌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법원행정처를 통해 임의 제출 형태로 PC를 받아 조사할 가능성 정도는 있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만에 하나 수사가 진행되더라도 추가조사위의 조사 결과는 ‘참고 자료’ 정도로 쓰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검찰이 압수수색물 분석을 통해 얻은 자료가 아닌 일종의 ‘내부 감찰’ 결과물인데다 조사 과정에서 불거진 ‘위법 증거 수집 논란’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23일 “(직권남용 혐의 적용 등은) 아직 검토한 바 없다. 조사 결과를 가지곤 세부적인 것까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당한 감찰” “위법” 추가조사위 조사 논란 재점화

추가조사위의 ‘PC 개봉’이 적법했는지도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쟁점은 조사 방식이 ‘정당 감찰’인지 ‘위법 증거 수집’인지다. 형법 316조(비밀침해죄)에 따르면 잠금장치가 돼 있는 저장매체는 당사자 동의 없이 임의로 해제할 수 없다.

일반 회사나 공공기관에서도 업무용 PC를 대상으로 감찰이나 내부 조사가 이뤄진다. 입사 전후로 작성하는 ‘감찰 서약 동의’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같은 서약 절차를 거치는 건 업무용 PC라 하더라도 개인 이메일, 사적인 문건 등이 저장 돼 있을 수 있어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2006년 회사 비밀을 빼돌린다는 의심을 받은 직원의 업무용 PC 하드디스크를 살펴본 혐의로 기소된 한 업체 대표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당 직원이 ‘모든 PC 자료는 회사 소유’라는 약정서를 쓴 게 근거가 됐다. 뒤집어 말하면 서약이 없을 경우 업무용 컴퓨터라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다는 취지다.

하지만 법원엔 감찰 서약 동의 절차가 없다. 때문에 문제의 PC가 업무용이고 사법부의 소유물(최종관리자는 법원행정처장)이라도 당사자 동의가 없다면 열어보는 게 적법하지 않다는 주장이 일었다. 형사법의 대원칙인 영장주의(형사절차상 강제 처분은 법관의 영장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를 판사들 스스로 어긴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서경환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이숙연 부산고법 판사는 법원 내부통신망 ‘코트넷’에 당사자 동의 없는 강제조사가 위법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추가조사위는 논란을 의식한 듯 몇 가지 조사 원칙을 내놨다. 자료 조사는 키워드 검색 등을 통해서만 하고, 이메일 등 개인 파일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근하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 [중앙포토]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퇴근하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 [중앙포토]

‘위법 논란’에 대한 법조계 안팎의 시선은 엇갈린다. 양홍석 변호사는 “법원 내 모든 공식 문서를 열람할 권한을 가진 대법원장이 추가조사위에 권한을 위임했다. 위법 소지가 없다”고 말했다. 한 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는 “PC를 강제 탈취한 게 아니라 법원행정처장이 추가조사위에 임의제출 한 것이다. 수사가 개시되더라도 ‘PC 소유자’인 대법원장 혹은 처장에게 영장이 발부될 것이라 영장주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한 서울고법 부장은“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데도 일종의 ‘강제 조사’가 이뤄졌다. PC를 개봉하려면 수사 기관에 의뢰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은 당사자 동의가 없는 ‘무단 개봉’이 이뤄졌다며 김 대법원장을 비밀침해, 직권남용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현재 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에 배당됐지만 검찰은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최후 승자는 검찰” 시험대 오른 ‘김명수 리더십’

김명수 대법원장은 23일 출근길에서 “일이 엄중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자료들을 살펴보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은 다음 신중하게 입장을 정해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관련자들에 대한 향후 대책 등에 대해선 “나중에 말씀 드리겠다”고만 했다.

법조계 안팎에선 “이번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태의 승자는 검찰이다”는 얘기도 나온다.
앞서 법원과 검찰은 국정농단 사건을 둘러싼 영장 발부, 기각 등을 놓고 기싸움을 벌였다. 검찰이 전ㆍ현직 대법원장을 수사 선에 올려놓고, 민감한 사법행정 자료가 담긴 PC를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법원 입장에선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다. 한 검사출신 변호사는 “검찰이 법원의 입장 표명을 기다리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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