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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에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였던 순간이 언제였나?’라는 질문에 1950년 7월부터 두 달간 이어진 낙동강 전투라고 답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낙동강 방어선은 전력이 앞선 공산군의 우회 돌파를 막기 위해 아군이 일부러 선택한 전략적 방어선이었다. 결국 전선을 좁혀 공산군의 남진을 저지시키면서 그 사이에 증원을 받은 아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위기는 과연 언제였을까?
1·4 후퇴 밀리던 미군 한반도 포기까지 검토 #전쟁 끝나기 직전 '파죽지세' 중공군 멈춰 #'의외의 반전' 중공군 보급 끊겨 승리 놓쳐
지난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비밀이 해제된 문서들이 속속 공개되면서 많은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에 따르면 진정으로 위기였던 순간은 1951년 1월 초였다. 당시 미국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한반도에서 즉시 물러날 준비를 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만일 그때 미군이 철군했다면 정황상 중공군을 국군 단독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은 공산군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이 크다.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한반도에 등장한 후 시도한 연이은 두 차례의 공세에 놀라 유엔군은 황급히 38선 일대로 물러났다. 유엔군이 지연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접촉을 거부하고 일사천리로 도망쳤을 만큼 처음 접해본 중공군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낙동강까지 다시 물러날 생각을 했지만 정작 미국 본토에서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12월 22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면 제주도로 약 200만의 한국인을 소개시켜 미니 정부를 수립하고 한반도서 떠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동요를 우려해 통보를 하지 않아서 우리 정부나 유엔군 사령부도 심각성을 몰랐다. 바로 그때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됐고 아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1월 10일경 평택-삼척을 잇는 37도 선까지 후퇴했다.
일단 여기서 전열을 정비했으나 일선에서는 중공군의 공격이 이어지면 다시 후퇴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때문에 만일 중공군이 공격 시늉만 했더라도 아군은 후퇴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불과 50킬로미터만 더 밀리면 유엔군은 철군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과도 같은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1월 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런 절박한 상황을 몰랐던 중공군은 일단 진격을 서울에서 멈추었다. 사실 당시 중공군은 보급이 열악해 한 달 정도의 준비를 거쳐야 일주일 정도 공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유엔군은 이러한 중공군의 약점을 몰랐지만, 막상 적도 전의를 상실하고 다시 후퇴할 생각만 하던 아군의 위기를 몰랐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은 공세 시늉만 해도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를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열흘 가까이 중공군의 움직임이 없자 신임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곤두박질 친 사기를 회복하기 위한 소규모 반격을 구상했다. 울프하운드로 명명된 작전에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말이 공격이지 적의 대응이 있으면 곧바로 작전을 중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는 6.25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1월 15일, 항공 엄호를 받으며 오산에서 1번 국도를 따라 수원으로 향한 이틀간의 수색 작전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수원 부근에 조우한 중공군은 상상 이상으로 보급수준이 열악해 가까운 시일 내에는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던 것이었다.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게 되면서 아군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됐다.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단지 낯설 뿐이지 결코 강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콜린스는 현 전선에서 반격하겠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6.25전쟁의 가장 위험했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면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남도현 군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