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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인생을 늪에 비유했다고 판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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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인기를 얻은 김광규 시인. 11권 800여 편에서 200편을 추린 시선집 『안개의 나라』를 펴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인기를 얻은 김광규 시인. 11권 800여 편에서 200편을 추린 시선집 『안개의 나라』를 펴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인 김광규씨가 올해로 77세, 희수(喜壽)를 맞았다. 달리 표현하면, 그의 1979년 대표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쓰인 지 40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에 맞춰 시인이 시선집을 냈다. 지금까지 출간한 11권의 시집에 실린 800여 편 가운데 200편가량을 추린 『안개의 나라』(문학과지성사)다.

77세 맞아 시선집 낸 김광규 시인 #4·19에 대한 회한·부끄러움 읊어 #촛불시위는 달라진 세상 보여줘 #쉽고 깊이 있는 시로 꾸준히 사랑 #“과한 정치 표현 피해야 오래 읽혀”

안개의 나라

안개의 나라

시인은 오래도록 ‘희미한…’으로 기억되겠지만 시선집에는 당연히 그 시만 있는 게 아니다. 일상성에 대한 관심으로 요약되는 시인의 세계답게 알기 쉬운 시편이 그득하다. 하지만 쉽다는 게 얄팍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슬그머니 공감이 가는 문장들, 묘한 의미의 흐름이 문면(文面) 아래 비쳐 보이는 작품이 많다.

17일 시인의 집을 찾았다. 시인은 “새벽 한두 시까지 전국의 시인들이 보내오는 시집이나, 문예지에 실린 독문학 관련 글을 챙겨서 읽는다”고 했다.

한국처럼 독일도 난해시가 강세인가.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독일시가 어려운 건 독일 현대시의 선구자인 릴케부터다. 릴케 시가 쉬워 보여도 깊이 들어가기는 어렵다. 릴케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다.”
시가 어려워지면 독자가 떨어진다.
“난해한 시를 쓰는 사람들이 억지로 그렇게 쓰는 건 아닐 거다. 시대현실이나 자기체험이 그렇게 만든 거다. 누구도 이해 못 할 어려운 텍스트를 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결국 언어로 쓰인 거기 때문에 누군가 이해하게 되지, 아무도 이해 못 할 텍스트는 없다. 나는 어려운 시를 쓰는 사람들을 존경까지는 아니지만 인정은 한다. 오죽하면 저렇게 썼을까. 그러나 결국 돌아올 것 같다. 계속해서 어려워져 아무도 시를 안 읽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이후 작품 세계가 정말 한결같은 것 같다.
“그 시집은 79년에 만들어졌지만 80년에 세상에 나왔다. 신군부가 판금시켰다. ‘희미한…’ 역시 원래 79년 문예지 ‘창비’ 가을호에 투고해 인쇄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신군부가 잡지까지 폐간하는 바람에 결국 시집에 실려 독자를 만나게 됐다.”

시인은 “부산대 교수 시절 하숙집에서 ‘희미한…’을 썼다”고 했다. 시에 나오는 것처럼 친구들을 만나 술 마시며 신군부에 대한 소문을 주고받던 시기다. “정작 4·19 시는 김수영·김춘수 같은 시인들의 시였는데, 한참 후에 4·19에 대한 회한과 부끄러움을 담아 쓴 내 시가 인기를 얻으며 마치 4·19 대표시처럼 돼버렸다”고 했다.

영어 번역된 김씨 시‘The Birth of A Stone’가 실린 미국 일리노이 주 교과서. 한국어 시 제목은 ‘어느 돌의 태어남’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어 번역된 김씨 시‘The Birth of A Stone’가 실린 미국 일리노이 주 교과서. 한국어 시 제목은 ‘어느 돌의 태어남’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4·19 때는 실제로 시위에 참가했나.
“당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문리대를 빠져나와 스크럼을 짜고 연건동 사거리까지 진출했다가 나중에는 경무대(지금 청와대) 앞까지 몰려갔다. 경찰들이 설마 때리랴 싶었는데 아프게 때리고 설마 총을 쏘랴 싶었는데 총소리가 들리더라. 허리를 다쳤는데 목숨은 보전해야 하니까 서촌 집으로 도망갔다. 집 근처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너 이놈, 데모했구나’ 그러더라.”
‘희미한…’이 실린 시집의 판금 이유는.
“나 같이 온건한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빨간 줄 칠 게 뭐가 있나. 육군 장교 검열관들이 ‘희미한…’의 맨 마지막 문장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에 빨간 줄을 쳐놨더라. 친구들끼리 술 마시고 헤어졌으면 집으로 가야지 왜 늪으로 간다고 썼냐는 거였다. 나이 마흔이 되면 자꾸 후줄근해지고 늪에 빠지는 거 같지 않나. 헤어날 수 없는 삶의 늪에. 전비(前非, 이전 잘못)가 있는 사람들이 색안경 쓰고 보니까 별게 다 이상하게 보였던 거다. 얼마나 웃겨.”
시를 쉽게 쓰는 비결이 있다면.
“쉽게 쓰기 쉽지 않다. 내 시를 흉내 내다 대개 실패한다. 내면의 깊이가 있으면서 쉬워야지 덮어놓고 쉽게 쓰는 게 아니다. 나는 굉장히 많이 고쳐 쓴다. 썼다가 넣어뒀다가 다시 꺼내 고쳐 쓴다. 몇 년씩 묵힌 것도 있고, 평균 스무 번 정도 고친다.”
시선집 표제작인 ‘안개의 나라’는 비판적인 작품인데.
“인간의 존재 상황 자체가, 가령 요즘 우리의 정치나 경제 현실을 봐도 안개 속을 헤매며 사는 거 아닌가. 그 시가 환기하는 바가 지금도 적용된다는 얘기다. 정보의 홍수에 살지만 너무 많다 보니 정보의 안개라는 말도 되지 않나. 우리 삶에 적용될 수 있는 타당성 있는 제목을 고른 거다.”
작년 촛불 시위는 어떻게 봤나.
“386세대가 거리로 나온 87년 내 또래는 이미 상당히 늪에 빠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넥타이 부대로 현장에서 구경이라도 했었다. 그 이후로는 못 나갔는데, 누군가 시위 총연출을 잘한 것 같다. 촛불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자기 몸을 태워 빛을 내는 거 아닌가. 조직도 잘한 것 같고. 그래서 결국 대통령을 감옥에 가뒀으니 혁명을 한 거다. 우리가 데모 1세대인데 책가방 끼고 스크럼 짜 거리로 나서던 때와 시위문화가 얼마나 달라졌나, 그런 생각을 했다.”
시선집 낸 감회는.
“일흔을 넘으니 급격히 노쇠하더라. 심장 맥박이 1분에 40회 이하로 떨어져 계단 오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지난해 말 심장박동기를 다는 수술을 받았는데 바깥에서 맥박 수를 조정할 수 있고, 그 부분이 불룩 튀어나와 있다. 로봇인간인 거지. 시선집 정리 잘했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아내와 결혼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시는 이래야 한다, 그런 게 있나.
“나는 변화하는 타입도 투쟁하는 타입도 못 된다. 인생을 그렇게 살았고 시도 그렇게 썼다. 정언적 명제를 이야기할 처지가 못되지만, 용감하고 투쟁적인 사람은 시를 투쟁의 무기로 삼을 게 아니라 진짜 무기를 잡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한다. 과거 정치적 검열이 있었지만 나 같은 경우 문학작품이 정치적 선언문이 돼서는 안 되겠구나, 그런 자기 검열도 있었다. 그런 걸 떠나야 시가 오래 읽힌다. 시는 약한 거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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