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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화려해진 도시는 46년 된 헌책방을 다시 밀어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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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의 사회탐구 

문 앞에 싸게 팔 책들을 내놓은 공씨책방. 20일 오후의 모습이다. [김경빈·이상언 기자]

문 앞에 싸게 팔 책들을 내놓은 공씨책방. 20일 오후의 모습이다. [김경빈·이상언 기자]

‘88서울올림픽’이 막 끝났을 무렵인 대학 3학년 가을에 선배 따라 처음 가 본 서울 광화문의 ‘공씨책방’. 퀘퀘한 냄새 풍기는 중고서적이 산처럼 쌓여 있는, 나날이 새로워지는 게 미덕인 세상과는 당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곳이 도심 복판에 있었다. 이 책방을 드나들며 민음사 계간지 『세계의 문학』 지난 호(號)들을 모으고, 절판된 소설책들을 구해 읽었다. 시인 정호승, 작가 박상률 등 쟁쟁한 문인들의 단골 책방에 다닌다는 생각에 공연히 뿌듯해 하기도 했다. 주인 공씨는 책더미 속에서 귀신처럼 원하는 책을 찾아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이 책방을 수년 전 신촌에서 ‘재발견’했다. 그런데 지난해 말 이곳이 아예 문을 닫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래서 가 봤다. 다행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헌책 교보문고’를 만들겠다며 #광화문에 터를 잡았던 공씨책방 #도심재개발로 신촌으로 옮겼으나 #임대료 인상에 다시 쫓겨나게 돼 #결국 전통의 헌책방 지하로 이전 #서울시, 문화유산 보존 위해 지원

책들이 줄지어 쌓여 있는 입구 옆에 ‘두 권에 1000원’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떨이 판매 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절반 정도의 책은 수십 권씩 끈에 묶여 있었다. 이사 가는 집 풍경이었다. 가게는 동업 주인 최성장(72)씨 혼자 지키고 있었다. 20일 오후 공씨책방의 모습이다.

이 책방은 지하철 신촌역에서 동교동삼거리 쪽으로 약 250m 떨어진 대로변에 있다. 신촌과 홍대 입구 사이에 있는 곳이라 오가는 이들이 많을 것 같지만 양쪽 역세권 밖에 있어 의외로 외진 느낌을 주는 곳이다. ‘공씨책방’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지만 지금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 중에 공씨 성을 가진 이는 없다. 원조 주인 공진석씨는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책방 운영은 그의 처조카와 처제가 맡아왔다.

고교 중퇴 학력을 가졌던 공씨는 20대 때 서울 청계천 변에서 헌책 노점상 일을 시작했다. 거기에서 돈을 모아 1972년에 경희대 앞(동대문구 회기동)에 중고 서적과 대학 교재를 파는 서점을 열었다. 46년 전통을 가진 공씨책방의 모태가 된 곳이다. 70년대 후반에 책방을 청계천 쪽으로 옮겼고, 80년대 중반에 광화문 인근으로 진출했다. 교보문고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100m쯤 떨어진 곳이었다. 지금 미래에셋빌딩이 서 있는 땅의 귀퉁이에 해당한다.

책방 안에는 옮겨야 할 책들이 끈에 묶여 있다. [김경빈·이상언 기자]

책방 안에는 옮겨야 할 책들이 끈에 묶여 있다. [김경빈·이상언 기자]

90년 7월 쉰 살의 공씨는 시내버스에서 쓰러져 심장마비로 숨졌다. 헌책들을 구해 들고 오는 길이었다. 그의 처제인 최성장씨에 따르면 공씨는 광화문 일대 재개발 때문에 가게를 비워주고 어디론가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시름에 빠져 있었다. 공씨는 ‘헌책 교보문고’를 만들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해 광화문 근처에서 옮길 곳을 찾아다녔으나 이미 치솟아 버린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공씨 작고 뒤 그의 처조카 장화민(59)씨와 최씨가 책방 운영을 맡았다. 둘은 책방에서 책 진열과 돈 받는 일을 하다가 졸지에 가게를 물려받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에 책방을 신촌으로 옮겼다. 최씨는 “단골이었던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가 ‘광화문 근처에 머물기 어려우면 대학교가 몰려 있는 신촌 쪽이 좋지 않겠냐’고 해서 이쪽으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

91년에 광화문에서 이사한 곳은 지금 책방 위치보다 신촌역(지하철)에 가까운, 덜 외진 곳이었다. 한데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면서 인근 상점 임대료가 줄지어 뛰는 통에 95년에 같은 길에서 수십m 동교동 쪽인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그런데 지난해 새로 바뀐 건물주는 130만원의 월세를 300만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다 월세 인상 요구를 철회하고 책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인근 동교동·서교동·연남동·연희동이 젊은이들이 몰리는 ‘핫 플레이스’가 되면서 그 주변 건물 주인들의 기대가 커졌다.

최씨와 장씨는 건물주가 너무 촉박하게 이사를 요구했다는 것과 이 책방이 서울시에 의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는 점을 주장하며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건물주가 소송을 내 승소했다. 책방을 비워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공씨책방이 사라진다’는 보도는 그래서 나왔다.

하지만 이 책방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다음 달 5일에 왼편으로 30m가량 떨어진 건물의 지하로 옮긴다. 지하라서 지나가다 들르는 손님이 줄 수밖에 없고, 책의 천적인 습기 때문에 늘 걱정해야 하지만 월세는 40여만 원 오른다. 돈벌이 안되는 헌책방은 도심에서 외곽으로, 그곳에서 다시 지하로 밀려났다. “앞으로 몇 년을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최씨와 얘기를 나눴다.

책방 주인 장화민(왼쪽)·최성장씨. 조카·이모 사이다. [김경빈·이상언 기자]

책방 주인 장화민(왼쪽)·최성장씨. 조카·이모 사이다. [김경빈·이상언 기자]

마음고생이 많았겠다.
“아예 장사를 접어야 하나, 이 책들은 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에 몇 달째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그나마 운이 좋아 마침 근처에 빈 곳이 있었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어 아예 문을 닫지는 않게 됐다.”
요즘 헌책방으로 돈 벌기 어렵지 않은가.
“돈 없어서 자꾸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 서럽기도 하다. 자괴감도 든다. 그래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하지만 남 속이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최씨는 이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손님이 얼마나 줄었나.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줄어들었다. 요즘엔 하루에 많아야 30명 정도 온다. 그중 절반 정도는 책이 아니라 CD(컴팩트 디스크)나 LP(레코드판)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다. 책 읽는 사람 보기 힘들지 않나. 지하철 타 보면 다들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요즘 손바닥만 한 책들도 나오는데, 젊은이들이 그런 걸 가지고 다니며 읽으면 좋으련만….” (공씨책방은 수년 전부터 중고 CD와 LP도 팔고 있다.)
왜 그만두지 못하나.
“최저임금 벌이도 안 된다.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 자꾸 붙들고 매달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도 책은 소중한 것이다. 고등학교도 못 다닌 내가 40년 넘게 일을 하다 보니 무슨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게 됐다. ”
지금 걱정은.
“책방은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 있어야 하는데, 지하로 옮기면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 말고는 손님이 없을 것 같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분들이 있어 버틸 수 있는 때까지는 버텨볼 생각이다.”

이 책방에 머물렀던 두 시간 동안 책을 사러 온 이는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은 기타 교본을 찾다가 그냥 갔고, 다른 한 명은 영어 공인시험 관련 책을 5000원에 샀다. 그를 붙잡고 물었다. 동교동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아 이 책방에 가끔 온다는 30세의 연세대 대학원생은 “이 근처 땅값이 올라 우리 집도 집을 허물고 건물을 세웠다. 그 덕에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동네가 새로워지는 측면도 있다. 그렇긴 한데, 기존의 좋은 것들도 계속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씨가 말한 ‘도와주는 사람들’은 공무원들이다. 서울시청은 2013년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 책방을 보존하기 위해 기업 후원금으로 앞으로 2년 동안 책방 월세 중 일부를 지원키로 했다. 2년 뒤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책방을 나서며 예전에 읽고 버렸던 소설책 두 권을 샀다. 이문구의 『우리 동네』, 이청준의 『황홀한 실종』이다. 동네와 실종, 두 단어가 절묘하게 결합하며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