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교수의 철학기행<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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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민족·지역·성별 등은「이름」에 불과 단합 이점 있으나 적대·차별 부작용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는 서양 철학사를 통해 저명한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해 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철학의 본산」임을 자처하며 현대 철학을 이끌어간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학교 뉴 칼리지의 「더미트」(Michael Dummit) 교수는 현대 영국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G·E·모어」등의 활약으로 한때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넘어갔던 주도권을 다시 옥스퍼드로 되찾아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새로운 진리 개념에 입각한 의미론적 입장에서 실제론을 논박한 가장 적극적인 반실재논자이며, 이 문제를 놓고 하버드 대학의「퍼트남」(H.Putnam) 교수와 팽팽히 맞서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요즈음 엉뚱하게도 카드놀이의 연구가로서, 그리고 인종주의를 맹공하는 이론가 및 행동가로서 널리 알려져 철학계에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요즈음 선거를 전후해서 우리나라에 소위 「지역감정」의 문제가 들끓고 있는 상황이라 이것이 실재론과 인종주의를 반대하는 그의 입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 그를 찾아 보았다.
우리는 소위 「실재론 논쟁」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은 원래 중세때부터 추상적인 대상, 가령 신이나 삭, 혹은 인간·동물·꽃 등 보편성을 떠는 관념들이 실제로 존재 (실재)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소산으로서 한낱 이름에 불과한 것(유명)인지를 가름하는 논쟁이다.
이러한 문제는 얼핏보기에 우리의 일상생활과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수도 있겠으나 자세히 검토해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신이 어떤 형태로든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름뿐이라고 주장하면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는 사람들은 어디든지 있기 때문이다.
실재론 논쟁의 심각성이 종교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위에 흩어진 여러 사물들과 현상을 서로 비슷한 것들끼리 한데 모으려는 경향이 있고 그렇게 모아진 것에 이름들을 붙이며, 이 이름들에 익숙해지면 이번에는 오히려 그 이름에 따라 여러 사물들과 현상을 일정한 울타리 속에 긁어 모아가두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들이 민족·인종·종교·지역·성별·이념들이며, 우리는 이런 관념들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돕고 뭉치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각기 미워하고 해를 입히며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민족이나 지역간의 투쟁, 인종 혹은 남녀간의 차별, 종교나 이념간의 갈등 따위가 싹트며 실제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현장은 이러한 복합적 요소들로 구성된 세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재론 논쟁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논정이며, 세계는 이처럼 마음속에만 있는 허상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상으로 얽히고 설켜 있어서 이것들을 분별하기는 좀처럼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실재하는 것이 정신적인 관념뿐인지, 혹은 물질적인 사물뿐인지에라 서로 입장이 바뀌어서 혼란을 빚어내기도 하지만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줄수도 있다.
남북의 분단과 정치적 지역감정, 고질적인 남존 여비사상, 심지어 자유나 평등, 민주화 등에도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 못지 않게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명분으로 내세움으로써 문제가 더욱 악화된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접근하여 문제의 핵심으로 파고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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