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취재일기

일본판 쉰들러가 아베 총리에게 바라는 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일본지사장

서승욱 일본지사장

심각한 얼굴로 TV 카메라 앞에 선 그가 이렇게 말했다. “스기하라씨의 용기 있는 인도적 행동은 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같은 일본인으로서 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

유럽을 방문 중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4일 오전(이하 현지시각)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 1900~1986)’ 기념관을 찾았다. 2차 세계대전 때 카우나스 주재 일본 총영사 대리였던 스기하라는 ‘일본판 쉰들러’로 불리는 인물이다. 나치 독일의 박해를 받고 폴란드에서 도망쳐온 유대인들에게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비자를 발급해 줬기 때문이다. 그가 1940년 발행한 비자의 개수는 기록에 남은 것만 2000장이 넘는다. 비자 한장으로 함께 탈출한 가족들까지 감안해 그가 구한 유대인의 수를 6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우리에겐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거로 찍혀있지만 역설적으로 아베 총리는 역대 일본 총리들 중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관련 시설을 가장 열심히 방문해왔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절묘하게도 그중 대부분은 아베 총리가 과거사 문제와 관련된 주변국과의 갈등으로 코너에 몰렸던 시기였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례로 2013년 12월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로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자초한 이듬해 3월엔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숨어지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의 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아베 총리는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마주하겠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세계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던 2015년 4월 미국 방문 때도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인신매매를 당해 고통을 겪은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판에 박힌 답변만 반복했다.

아베 총리는 이번에도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한·일간 갈등이 거세지는 와중에 스기하라 박물관을 찾았다. 일본 정부의 주장처럼 국가간 약속은 존중하고 실행하는 게 국제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스기우라의 인도적 행동을 그토록 소중히 여긴다는 아베 총리가 유독 위안부 문제에서만 “1mm(밀리미터)도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도주의와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치 피해자를 애도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 진심의 일부만이라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여달라고, 스기하라는 자신의 박물관을 찾은 아베 총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을까.

서승욱 일본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