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회원국 애국심' 제동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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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유럽연합(EU)이 회원국들의 '경제 민족주의' 차단에 나섰다. 회원국 간 에너지 교역을 감독할 단일 기구 창설을 통해서다. 이는 최근 에너지업계의 국제적 인수합병(M&A)에 대해 개별국가 차원의 돌발적인 견제와 제지가 잇따르고 있는데 대한 대응책이다.

EU 집행위원회는 9일 '에너지분야 정책구상 보고서'를 내고 EU 차원의 에너지 규제기구 설립을 제안했다.

EU 집행위는 이 기구에 비상사태 때 EU의 석유.가스 비축분을 관리하고 러시아와 같은 에너지 공급국가들과 EU를 대표해 단일 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구상이다.

또 이같은 권한을 바탕으로 평소 에너지 산업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기업 활동을 보장할 계획이다. 여기엔 다국적 에너지 기업 간의 M&A도 포함돼 있다.

주제 마누엘 바로수 위원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개방된 시장만이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며 "어떤 종류의 애국주의도 거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U는 또 안보와 국익을 내세워 외국기업의 자국기업 M&A를 막는 회원국에 대해 경고를 주기로 하고 1차로 폴란드 정부에 서한을 보냈다.

이탈리아의 우니크레디토 은행이 폴란드 은행 BPH를 인수키로 하자 폴란드 정부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EU 집행위는 폴란드 정부의 결정이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기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EU 법규를 위반했다고 보고 있다.

또 EU 집행위는 6일 스페인 정부에 대해서도 우려의 뜻을 전달했다. 스페인 정부가 자국 전력회사 엔데사에 대한 독일 에너지그룹 에온의 인수계획을 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3일엔 프랑스에 "국영 에너지 기업인 가즈 드 프랑스(GdF)와 수에즈의 합병 과정에 정부가 어떻게 개입했는지 답변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EU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경제부문에서 불고 있는 개별 국가의 민족주의 정서가 유럽 통합의 근본 정신을 해칠 수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지난해 유럽헌법의 도입이 좌절된 것도 EU 집행위의 위기의식을 크게 자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EU엔 회원국들을 효과적으로 제제할만한 수단이 없는 상태다. 유럽 사법재판소에 제소해 관련 법규를 고치게 하거나 벌금을 물릴 수는 있지만, 지나치게 시간이 오래 걸려 실효성이 없다. 에너지 규제기구를 설립하려는 것도 EU가 실질적인 제재권을 확보하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 때문에 프랑스 등 일부 회원국은 국가 기간산업인 에너지 분야의 권한을 EU 집행위에 넘기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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