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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외교수장 한날 동시에 위안부합의 파기 가능성 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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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위안부 합의, 모든 것 가능" 대통령 이어 파기 가능성 시사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외교부에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 결과에 대한 모두발언을 마친 뒤 퇴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외교부에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 결과에 대한 모두발언을 마친 뒤 퇴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부가 위안부 피해 문제에 있어 ‘피해자 중심주의’ 실현을 내세우며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도 염두에 둔 듯한 태도를 이어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위안부 합의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한 지 꼭 1주일 만인 4일 다시 문 대통령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움직였다. 문 대통령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 8명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나눔의 집 등 피해자 지원 단체 관계자 등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진실과 정의의 원칙에 어긋났고 내용과 절차가 모두 잘못된 것'이라며 종전 보다 강한 톤으로 합의 파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앞서 강 장관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위안부 합의를 파기할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강 장관은 이어 “그렇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도 충분한 생각을 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장관은 피해 할머니들이 파기를 요구할 가능성에 대해 묻자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런 요구를 하시리라고 생각되지만 정부로서는 중요한 이웃인 일본과의 관계도 관리해야 할 부분이 있다”며 “어떻게 보면 상반된 디맨드(요구) 속에서 정부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어려움이지만, 어쨌든 진정한 소통을 할머님들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답했다.

 대통령과 대일 외교의 주무부처인 외교부 수장이 지속적으로 사실상 파기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은 위안부 합의 태스크포스(TF)의 검토를 통해 발견된 하자가 합의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대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2015년 한·일 간 합의 당시 밝히지 않은 비공개 내용이 있다는 TF 결과 발표 이후 위안부 합의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더 커진 것도 정부가 이런 판단을 하는 근거다.

 위안부 합의에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재협상과 파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재협상은 합의의 상대방인 일본 측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고, 파기할 경우 한·일 관계 악화가 불가피하다.

 정부는 또 피해자 중심주의를 핵심으로 꼽으면서도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 구체적 방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강 장관은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가능한 한도 내에서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의견이 엇갈릴 경우 이를 어떤 식으로 정책에 반영할지 기준을 정한 것은 없다고 한다.

 피해자의 범주를 놓고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강 장관은 이날 “합의 당사자인 피해자와 그 분들을 지원해온 단체들과 소통이 부족했던 게 가장 큰 흠결”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외교가에서는 논란이 있다. 단체가 지원하는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필요하지만, 단체 관계자들까지 피해자에 준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한 이견이다.

 대외적으로 뚜렷하게 합의 반대 의견을 밝혀온 단체들 위주로 의견이 수렴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는 모든 피해자가 아니라 ‘목소리 큰 피해자’ 중심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 청와대 박수현 대변인은 위안부 할머니 초청 오찬이 끝난 뒤 발표한 서면 브리핑에서 합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할머니들의 발언 내용만 소개했다. 이날 초청된 피해자 중에는 합의의 결과물로 출범한 화해·치유 재단의 지원금을 수령했거나, 기존 합의로 문제를 매듭짓고 싶다는 의견을 그동안 밝혀온 할머니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발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합의 당시 생존 피해자 47명 중 36명이 지원금을 받았다.

진창수 세종연구소장은 “목소리를 많이 낸 사람 뿐 아니라 침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정대협을 만나봤으면 화해·치유 재단도 만나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지혜·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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