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건강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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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시형<고려병원·신경정신과장>
「전라도 가는 길에 발가락이 또 하나-」잘려난 발가락을 황토에 묻고 또 먼길을 뗘나야하는 문둥이의 심경. 건강한 사람으로선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내가 한하운선생을 만난건 의예과시절이었다. 무더운 여름 음악다실에서 였다. 선생은 하얀 장갑을 끼고 우리를 맞았다. 누가 봐도 완연한 문둥이였다. 하지만 선생은 참으로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지나친 겸손도 허세스런 과장도 아니었다.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저렇게 아름다운 마음씨기에 파랑새를 읊을수도 있었겠구나. 몸은 흉해도 마음은 파탕새 깃털처렴 포근하고 아름다왔다. 사람들의 냉대와 버림을 선생은 용서하고 있었다. 그런건 이미 초월하고 있었다. 이빨을 갈기보다 드넓은 아량으로 관용하고 있었다고.
병든 자의 외관이 화려할순없다. 오랜 병고에 시달린 사람은 보기에도 흉하다. 움푹파인 양볼하며 껑충한 어깨, 수척한 몸매가 결코 즐거운 모습은 아니다.
사람은 이상하게 외관이 추하면 속도 그러하다. 몸이 불편하다고 아무렇게나 입은채로 외출하면 마음마저 음울해진다.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여기가 갈림길이다. 몰골이 그럴수록 마음이 더 아름다와지는 사람, 더욱 진지하고 강렬해지는 사람이있다.
「고흐」의 생애도 가난과 굶주림속의 처절한 생활이었다. 과로가 겹쳐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했다. 하지만 그후 아르르에서의 요양생활중 그의 색채는 더욱 화려하고 선영해진다. 불타는듯한 강렬한 그의 그림앞에 서면 과연 이작가가 우울증으로 요양하고 있었나 의문이 간다. 어떻거나 그의 불후의 명작들은 이 시절에 그려진 것들이다.
불행히 그는 끝내 병세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권총자살이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처참하고 암울했던 그의 생애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작품은 너무나 화려하고 강렬했었다.
실연의 고통속에 주옥같은 명곡을 남긴 수많은 음악가를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폐결핵으로 병약해진 소녀에게 넋을 잃은 많은 명사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가하면 폐결핵 요양중 얼마나 많은 명작들이 쓰여졌던가. 사람이 아프면 코스모스처렴 애잔한 미가 안개처렴 드리운다. 병실 비스듬히 황혼이 들면 환자들이 아릅답게 보이는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애상조의 감상도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일과에 따라 요양생활에 충실한 환자의 자세에서 인간의 진실을 느낄수 있는것도 사실이다.
병석에 누운 사람에게 무슨 허황한 욕심이 있으랴. 주어진 나날에 충실하고 주어진 것들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살아갈 뿐이다. 맹인들의 조용한 웃음을 기억할 것이다. 무슨 사심이 있으랴. 평화롭고 소박하다. 눈 뜬 사람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병고에 시달린 육신, 고통받는 마음의 상처가 오랜 세월 갈고 다듬어져 아름다운 정신세계로 승화되어진다. 거친 갯바위 돌이 오랜 세월 파도에 밀려 오가며 씻기는 사이, 어느덧 진주알처럼 하얀 모래알로 다듬어지듯 마음먹기에 따라 오랜 투병생활이 우리를 한없이 아름답게 가꾸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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