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 일왕 '통석의 염' 발언과 위안부 갈등의 아이러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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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 때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양국 과거사와 관련해 밝혔던 ‘통석(痛惜)의 염(念)’이란 표현은 일왕 본인의 의지를 담아 일본 정부가 마련한 표현이었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30일 보도했다. 요미우리의 보도는 당시 총리였던 가이후 도시키(86ㆍ海部俊樹)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 것이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때 아키히토 일왕이 써 #일본내 반대에도 "마음 제대로 전하고 싶다"며 강행

신문은 "1984년 일본을 방문한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히로히토 일왕(아키히토 일왕의 부친)은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는 건 참으로 유감’이란 표현을 했지만, 한국 측엔 ‘누구의 책임인지가 불명확하다’는 불만이 남았고, 6년 뒤인 90년 노 대통령의 방일 때 더 진전된 내용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1990년 왕궁만찬석상에서 건배하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아키히토 일왕[중앙포토]

지난 1990년 왕궁만찬석상에서 건배하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아키히토 일왕[중앙포토]

당시 일본에선 자민당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이해가 걸린 문제에서 천황(일왕의 일본 내 호칭)이 말을 하게 해선 안 된다"며 신중한 대응을 요구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키히토 일왕은 당시 노 대통령과의 만찬장에서 "우리나라에 의해 야기된 불행한 시기에, 귀국(貴國·상대국가를 높이는 말)의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나는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요미우리는 전했다.

가이후 전 총리에 따르면 일왕의 정치적 행위를 금지한 일본 헌법 규정을 따라 당시엔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총리가 사과하면 충분하다’는 쪽으로 입장이 정리돼 있었다. 하지만 아키히토 일왕이 궁내청을 통해 "과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입장을 전해오면서 결국 전문가들의 조언을 수렴해 해당 문구를 정부에서 결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그 뒤로도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2001년 12월 생일 기자회견에선 "헤이안 시대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쓰여 있는 데 대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1300여년전 일본에 정착한 고구려 왕족을 기리는 고마 신사를 지난 9월 방문한 아키히토 일왕 부부.[연합뉴스]

1300여년전 일본에 정착한 고구려 왕족을 기리는 고마 신사를 지난 9월 방문한 아키히토 일왕 부부.[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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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가능성도 자주 거론됐다. 지난 89년 즉위 당시부터 한국과 중국 방문에 대한 질문에 "기회가 있다면 이들 나라에 대한 이해와 친선관계 증진에 노력하고 싶다"며 방문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등을 계기로 한 방한 가능성이 타진됐지만 양국 내부의 신중론 때문에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방한 논의가 사라진 건 2012년 이후다.

아키히토 일왕이 밝힌 ‘통석의 염’은 일왕이나 역대 일본 정부가 밝힌 사과 발언들 중 상대적으로 진전됐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발언이 2012년 다시 논란이 되면서 방한 논의가 끊기게 됐다.

그해 8월 독도를 방문했던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교원들과의 워크숍에서 "아키히토 일왕도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며 "(일왕이) 한 몇 달 단어를 뭘 쓸까, 또 ‘통석의 염’ 뭐가 어쩌고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다. 독도 방문에 이어 나온 이 발언에 일본이 강하게 반발하며 양국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아키히토 일왕은 2019년 4월 퇴위한다. 아들인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다음날인 2019년 5월 1일 즉위할 예정이다. 요미우리는 “방한이 가능한 환경이 아니다”라는 일본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소개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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