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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함께 있어도 남 같아 … 우리 사이도 ‘관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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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태기’를 겪는 사람들은 같이 있어도 각자 행동하며 우울감과 공허함을 느끼곤 한다. 프리랜서 김동하

‘관태기’를 겪는 사람들은 같이 있어도 각자 행동하며 우울감과 공허함을 느끼곤 한다. 프리랜서 김동하

 연말이 되면 송년회를 핑계로 만남이 잦아진다. 평소 뜸했던 사이라면 어색하게, 막역한 사이라면 무감하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왠지 마음이 허전해지는 이유는 뭘까? 혼자여도 외롭고 함께여도 외롭다는 말이 실감난다면 ‘관태기(관계+권태기)’를 의심해보자. 1년의 마무리와 시작, 좋은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

경쟁 사회가 관계 회의감 부추겨 #서로 다름 인정, 객관적 바라보기 #문화 공감대 형성하는 노력 필요

#김모(33)씨는 지난주 시작된 연말 모임으로 매일 저녁 술에 취한다. 그가 참석하는 자리는 오랜 동창 모임부터 평상시 눈인사만 나누던 회사 동료 모임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평소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 왁자지껄 떠들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이유 모를 우울감과 공허함을 느낀다. 김씨는 “잊지 않고 연락해주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지만 의무적으로 만나는 느낌이 든다”며 “필요할 때 내 옆에 있는 진정한 친구는 누굴까 생각해보게 된다”고 말했다.

# 대학 동기들과 송년회를 하기로 한 정모(35)씨는 그날 입을 옷과 가방 등이 고민이다. 평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진으로만 일상을 공유한 친구들에게 예쁘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정씨는 “일상이나 고민을 이야기하기보다 다들 명품 옷과 가방으로 치장한 채 자신을 과시하기에 바쁘다”고 말했다. 정씨는 약속 자리를 준비하면서도 소비적인 만남에 대한 회의감을 토로했다.

화려한 모습만 공유하며 관계를 맺는 사람이 많다.

화려한 모습만 공유하며 관계를 맺는 사람이 많다.

최근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현대인이 늘고 있다. 신조어 ‘관태기’가 유행어로 떠올랐다. 관태기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새로운 사람과 관계 맺는 것에 권태기를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강승걸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람을 만나면서 행복감 대신 공허함을 느끼게 되면 만남을 기피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고 싶어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관계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로 경쟁 구도의 사회 분위기를 꼽는다. 친구나 동료를 위로와 힘을 주는 존재로 인식하기보다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와 취업난이 그 배경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경쟁심은 결국 열등감과 자기 비하로 확대된다

자기중심적 가치관도 관계 거부

현대인의 자기중심적 가치관도 관계 맺기를 어렵게 한다. 공동체보다 자신의 행복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친구를 사귈 때도 ‘내가 좋아하는, 내 취향에 맞는’ 친구만 선택적으로 사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기준과 다를 경우 만남이 피곤하게 느껴지고 소비적 시간으로 생각돼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된다. 이런 사람은 소위 ‘티슈 인맥’을 갖게 된다. 티슈 인맥은 한번 쓰고 버리는 휴지처럼 필요할 때만 짧게 만나고 소통하는 일회성 인간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관태기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서 완전히 혼자만의 삶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관계에 회의감을 느끼지만 이면에서는 친구와 만나 외로움이나 슬픔을 해소하길 바란다. 최근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인 남녀 1285명 중 68.4%가 “사람들과의 연말 모임을 계획하고 있다”고 답했다. 지난해 같은 조사에서 53.6%인 것과 비교하면 만남을 계획하고 있는 비율이 더 높아진 것이다. 반대로 “연말 모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지난해 20.8%에서 올해 7.9%로 절반 이상 떨어졌다. 강승걸 교수는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행위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본능이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SNS나 모바일로 쉽게 연결되더라도 때로는 얼굴을 맞대고 봐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폭넓은 친구관 가져야

그렇다면 관태기를 최대한 줄이고 만남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먼저 다름을 인정하고 보다 넓은 친구관을 갖길 권한다. 사이가 좋다가 갑자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관계가 있을 때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라고 조언한다. 만남에 있어 압박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무엇인지 인식한다면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다. 내년 2월까지 ‘친구의 발견’을 주제로 전시를 진행하고 있는 김이삭 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 관장은 “타인이 나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며 친구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며 “학교폭력, 따돌림, 사회 부적응, 집단 우울증, 불신 등 사회문제가 만연한 요즘 어린 자녀가 친구에 대한 폭넓은 시선을 갖도록 도와주는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에만 그쳤다면 함께 문화 공연, 전시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친구를 경쟁과 비교 대상이 아닌 신선하고 참신한 콘텐트를 함께 경험하는 동반자로 여길 수 있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공연이나 영화, 콘서트 등을 단조로운 만남과 상투적 관계를 깨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며 “문화 콘텐트를 통해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 보면 관계의 친밀함을 자연스럽게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라예진 기자 raye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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