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 25일-고흥길<정치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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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6공화국이 개막됐다.
전두환 대통령 시대가 가고 노태우 대통령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악몽과도 같았던 작년 6월의 소용돌이를 생각할 때 오늘의 이 평화스러운 정권교체는 실로 만감을 교차케 한다.
우리는 최근 헌정사상 우리가 일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몇 가지 특이한 사실들을 목격했다.
와이셔츠 바람의 차기 대통령과 총리 내정자 등이 벌이고 있는 신 정부 조각작업, 대통령 취임 준비위의 정권 인수준비, 현직 대통령의 고별회견, 고별만찬, 같은 승용차에 올라 취임식장으로 향하는 전·현직대통령의 모습 등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 평화적 정부이양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제5공화국 출범이래 우리는 평화적 정부이양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지만 국민 어느 누구도 이를 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여러 차례 반복된 지나간 정권들의 개헌을 통한 집권연장기도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국민들로서는 무리도 아니었다.
대통령이 단임을 강조하니까 국민들은 의구심을 갖게되고 국민들이 의심을 하니 대통령은 이를 계속 반복하게돼 결국「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제5공화국의 생성과정과 행적으로 봐서는 평화적 이양의 약속을 액면대로 믿기 어려운 측면도 없지 않았다.
출범과 동시에 정통성 시비로 뒤뚱거리는가 하면 각종 대형 사건사고로 인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말이 아니었고 고위층 주변을 둘러싼 악성루머와 유언비어는 정권의 도덕적 기반을 위협할 정도였다.
특히 대통령이 군과 경찰에 대해 각별한 신경을 쓰고 1만명이 넘는 평통 자문위원들을 계속 청와대로 불러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기념촬영을 하는가하면 민정당의 최일선 말단 당직 자 들을 지구당별로 불러 격려함으로써「장기적인 포석」을 하는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도 없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민정당 당직자들과의 어느 만찬에서 대통령이『그만둬도 민정당 총재직은 계속 할꺼야』라고 한말이 와전되어「영구집권」음모를 하고있다는 비난을 야당으로부터 받는 등 물의가 그치지 않았다.
더우기 뚜렷한 후계자가 부상되지 않은 가운데 권력핵심부에서는 간간이 불협화음의 소리도 없지 않아 시계를 더욱 흐리게 했던 게 사실이다.
결국 87년 6월의 민정당 대통령 지명대회로 후계자를 둘러싼 잡음과 단임 실천 여부에 대한 의심이 일단 가시게 됐기만 6·29선언 이후에도 9월 위기니 11월 위기니 하는「위기설」 이 계속 나돌아 평화적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들의 확신은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서게됐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성취된 평화적 정권교체이기에 더욱 값지고 뜻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전두환 전대통령은 오늘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데 관한 한 대통령으로서 해야할 의무를 충실히 다했다고 평가받을만하다.
그 동안 단임 약속을 파기하라는 국내외의 권유와 유혹이 적지 않았고 권력을 내놓기 어렵게 하는 여러 가지 부정적 요소들, 다시 말해 불신풍조·정치보복에 대한 위협분위기·인간적인 공허감 등도 많았지만 이를 개인적인 인내로 모두 극복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전전대통령이 단임 약속을 스스로 이행한 것이지 대세에 밀려 할 수없이 정권을 내놓은 것이라고 보는 일부견해에는 찬동하기 어렵다.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수립을 위해서는 집권자가 해야 할 일과 그 밖의 정치권이나 국민이 해야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된다.
이제 남은 것은 정치권과 우리국민들이 해야할 일이다.
평화적 정권교체는 단순히 집권자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 가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저술이나 사회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외국의 경우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대통령 인수인계법·대통령 도서관법 등을 우리도 이제는 수용할 수 있는 아량과 정치적 성숙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노태우 대통령과 전전대통령과는 4차례에 걸친 임무교대를 했다고 한다.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지금은 없어진 직제지만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국군 보안사령관, 그리고 이번의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전전대통령 후임으로 노 대통령이 막바로 바통을 이어 받았다.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가 항상 좋게만 끝나지는 않는 우리사회 풍토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 이제까지는 한번도 교대에 따른「언짢은 일」이 없었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이제 평화적 정권교체의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중요한 임무교대가 또 남아있는 셈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 대통령이 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전전대통령이 맡고있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인계 받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5번째가 될 93년 2월25일의 원로회의 의장직 임무교대가 무사히 예정대로 이뤄질 때 우리 나라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비로소 그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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