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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판결이 항상 진실은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현예슬의 만만한 리뷰(20) 영화 ‘세 번째 살인’

[※ 보는 사람에 따라 스포일러라 생각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판결이 진실과는 무관하게 내려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 #감독, "보고 나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품" #기존의 가족영화에서 벗어난 과감한 시도

냉철한 변호사 시게모리 역을 맡은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미스터리한 살인법 미스미 역을 맡은 야쿠쇼 코지가 접견실에서 대면하고 있다.

냉철한 변호사 시게모리 역을 맡은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미스터리한 살인법 미스미 역을 맡은 야쿠쇼 코지가 접견실에서 대면하고 있다.

지난 10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하면 가족영화가 생각날 정도로 그의 작품은 주로 가족 이야기를 따뜻하고 섬세한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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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 <세 번째 살인>은 기존의 가족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 탈피하여 살인 사건을 다뤘다는 점에서 많은 팬의 기대를 모았는데요. 이런 기대 때문인지, 지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예매 오픈과 동시에 매진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저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으로서, 이번 영화가 기존의 영화들과 어떻게 다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밤 천변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둔기로 머리를 수차례 내려친 다음, 이미 죽은 시체에 불까지 지르죠. 가해자는 미스미(야쿠쇼 코지 분), 피해자는 그를 해고한 공장 사장입니다.

살인사건 조사를 시작한 시게모리와 그의 동료. 미스미는 살해 후 시체를 불태웠다.

살인사건 조사를 시작한 시게모리와 그의 동료. 미스미는 살해 후 시체를 불태웠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모든 범행을 자백하고, 이변이 없는 이상 사형이 확실시되고 있는 와중에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분)가 이 사건을 맡습니다. 시게모리는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진실보다는 의뢰인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는 냉철한 변호산데요. 모든 범행을 자백한 미스미의 형량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사건조사를 시작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진술을 번복하는 미스미와 피해자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 분)의 새로운 증언으로 미스미가 정말로 공장 사장을 살해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믿었던 수많은 진실들이 과연 사실일까요?

피해자의 딸 사키에 역을 맡은 일본의 국민여동생 히로세 스즈.

피해자의 딸 사키에 역을 맡은 일본의 국민여동생 히로세 스즈.

<세 번째 살인>은 보고 나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좋은 의미로 관객에게 멋진 배신감을 주고 싶었습니다. -감독의 말 중에서

영화가 끝나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감독의 말’이었습니다. ‘보고 나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품’이라는 설명은 이 영화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확한 표현이 아닌가 싶었죠.

대한민국 헌법 제27조 1항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판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해서 그 재판이 항상 진실을 가려줄 수 있을까요? 영화는 판결이 진실과는 무관하게 내려진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미스미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미스미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다른 법정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한 사건이 펼쳐지고 용의자를 확정한 뒤 조사를 통해 범인을 가려냅니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잘못한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일종의 통쾌함을 맛볼 수 있죠. 잘못 해도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혹은 벌을 주지 않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작품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 여느 법정물과는 다릅니다. 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건을 파헤칠수록 믿을 수 없게 되고, 심지어 자백했던 범인조차도 진술을 번복하니 변호사마저 ‘내가 지금 믿는 게 맞는 것인가’라는 의심을 하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재판이 과연 정확한 사실을 알고 판단하는 것인지,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그저 판사 개개인의 판단으로 한 사람을 무죄 또는 유죄로 결정지을 수 있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공포가 밀려왔죠.

모든 증거와 증인이 내가 살인자라고 말할 경우, 나는 그냥 살인자가 돼버리는 거죠. 그저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서요. 어쩌면 사람들이 믿는 바가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러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평등하다는 편견을 깨부수는 동시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영화에서 미스미와 시게모리의 접견 접견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미스미와 시게모리의 접견 접견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명장면이라면 단연 미스미와 시게모리의 접견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좁은 접견실에서 오직 두 사람의 대사와 표정만으로 관객들을 긴장감 속에 몰아넣습니다. 특히 두 배우의 얼굴이 접견실 사이의 유리 벽에 겹쳐 보이는 연출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압도적인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 영화에는 이탈리아 음악의 거장 피아니스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가 OST에 참여했죠. 감독은 에이나우디가 작곡한 four dimensions(사차원)를 들었을 때 마음속에 새하얀 설경 이미지를 떠올렸고, 이번 영화의 설경 장면에 음악을 넣음으로써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홋카이도 설원 장면에서 이탈리아 음악의 거장 피아니스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곡이 흘러나온다.

홋카이도 설원 장면에서 이탈리아 음악의 거장 피아니스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곡이 흘러나온다.

명쾌한 사건 해결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 조금 느리고 답답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감독의 말처럼 보고 나면 할 말이 많아지게 되는 건 사실입니다. 또 기존의 가족영화의 모습을 기대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거침없는 변화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와 함께하세요.

세 번째 살인

영화 <세 번째 살인> 포스터.

영화 <세 번째 살인> 포스터.

감독·각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후쿠야마 마사하루, 야쿠쇼 코지, 히로세 스즈
촬영: 타키모토 미키야
음악: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장르: 스릴러, 미스터리, 드라마
상영시간: 125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개봉일: 2017년 12월 14일

현예슬 멀티미디어 기자 hyeon.yeseul@joongang.co.kr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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