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공직자 재산 공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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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급 이상 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 판.검사 등 1000여 명의 재산 내역이 공개됐다. 1993년 공직자 재산등록제가 처음 도입된 이후 매년 재산이 공개될 때마다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문과 방송은 물론이고 인터넷에서도 성토와 비난이 줄을 잇고 있다. 공직자 재산 공개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재산 등록.공개제도의 원래 취지는 공직자의 부당한 부의 축적과 부정부패를 막고 감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 제도가 시작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됐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국무회의에서 자신의 재산을 공개한 뒤 분위기를 몰고갔다. 군부독재의 잔존세력과 민정당 출신 정치인을 몰아내는 방편으로 공직자 재산등록제를 밀어붙인 것이다. 그 결과 구 세력을 축출하는 데는 일정 부분 성공했고, 공직사회를 맑게 하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경제관료들이 업무상 취득한 정보를 이용해 주식투자를 하는 것도 막았고, 고위공직을 꿈꾸는 이들은 부적절한 수단으로 재산을 증식하려 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재산이 많은 공직자는 재산 형성과정에 대한 변변한 해명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수십 년 몸담은 공직에서 떠나야 했다. 그 재산이 상속에 의한 것이든, 정당한 증식과정을 거친 것이든 상관없었다. 재산이 많다는 게 부정부패를 했다는 말과 동일시됐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시각이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당사자들과 가족들은 매년 재산 공개 때마다 고통을 겪어야 한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입법.행정.사법부의 상위 10위의 명단을 싣는다. 돈 많은 자에 대한 질시와 관음증, 포퓰리즘에 동조하고 부채질하는 것이다. 말을 4필 갖고 있다느니,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유하고 있다느니, 현금을 몇 억원 보유하고 있다느니 하면서 요란스럽다. 서울 강남에 사는 것도 문제 삼는다. 그것이 재산공개의 취지와는 무관한데도 말이다.

시민단체나 언론이 "신고 가격이 시세와 너무 차이가 난다"며 "공직자 윤리법에 문제가 있다"고 포문을 열었지만, 이 또한 제도의 근본 취지와는 별 상관이 없다. 최초로 신고한 부동산값은 팔지 않는 한 몇 배로 뛰어도 그대로 기록된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그러나 7500만원에 구입한 골프장 회원권 값이 지금은 10억원이 넘는다고 한들 당사자의 부정부패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청와대가 "그런 비판에 일리가 있다"며 공직자 윤리법 규정의 보완을 검토하겠다고 나선 것도 당치 않은 일이다.

이제 공직자 재산공개를 한 지도 13년이 지났다. 재산이 많은 공직자를 백안시하는 풍조도 바뀌어야 한다. 부동산 투기나 직위를 이용한 재산 증식, 부정부패 등을 감시하기 위한 공직자 재산공개제도의 본래 취지에 충실할 때가 됐다. 정부도 공직자의 재산 공개만 으로 끝내지 말고 변동 상황을 정밀검증하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