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허약한 리더십, 필리핀의 불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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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이곳에선 피플 파워 20주년 기념 미사가 있었다. 코라손 아키노와 피델 라모스 등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정계 거물이 상당수 참석했다. 미사를 집전한 가우덴치오 로잘레스 추기경이 필리핀의 변화와 가난 퇴치가 진정한 피플 파워 정신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성당 주위를 돌아봤다.

다섯 살쯤으로 보이는 거지 아이 두 명이 달려와 동전 한 닢을 구걸한다. 성당 뒤쪽에도 10여 명의 거지가 30도 무더위에 아랑곳없이 연방 몸을 굽실거린다. 이런 거지 수준의 국민이 전국에 1000만 명을 넘는다.

"전국구는 10페소(187원), 지역구는 3페소(56원)." 필리핀 정치인들이 사석에서 농담 삼아 한다는 얘기다. 유권자 한 명당 이 정도만 쓰면 국회의원 당선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필리핀의 오늘이다.

20년 전 세계로부터 경탄을 넘어 존경에 가까운 찬사를 받았던 피플 파워를 이뤄낸 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모두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에서 오는 결과다. 피플 파워로 대통령이 된 코라손 아키노 역시 재임기간 중 10여 차례나 쿠데타 모의에 시달렸다. 이 와중에 그는 정치와 경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국가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150여 명문 가문의 반발에 부닥쳤다. 그의 가족 역시 필리핀 최대 지주 가문의 하나여서 개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자신이 피플 파워의 상징이었지만 강력한 리더십이 없어 혼란만 야기하다 재선에 실패했다.

지난해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쿠데타 모의에 참여했던 군인들을 모아놓고 다시는 쿠데타를 하지 말라며 훈시한 뒤 풀어줬다. 이전에는 팔굽혀펴기 수십 번과 곤장을 몇 대씩 때린 뒤 부대로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이 매년 반복된다. 그때마다 혼란을 감당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국가비상사태를 몰고 온 지난주 쿠데타 모의도 같은 맥락이다. 마닐라에서 취재 도중 만난 자이나브 암푸투안(여행사 경영)은 "피플 파워 이후 부패와 혼란이 계속되자 강력한 리더십으로 사회라도 안정시켰던 마르코스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패를 척결하고 사회안정을 이룰 리더십 있는 대통령 한번 만나는 게 필리핀 국민의 소원이라고 했다.

최형규 특파원 <마닐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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