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시(Battersea) 발전소는 모른다 해도 이 건물의 적갈색 벽돌 외관과 네 개의 하얀 굴뚝은 한 번쯤 봤을 것이다. 영국의 록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1977년 앨범 ‘애니멀스(Animals)’의 표지에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첩보 스릴러 ‘사보타주’(Sabotage·1936)의 도입부에도 등장한다. 하퍼스 바자 등 패션잡지들도 이 건물에서 영감을 얻어 수많은 화보를 구성했다.
30년간 잠자던 낡은 발전소의 변신
각각 두 개의 굴뚝을 지닌 쌍둥이 건물로 이뤄진 이 화력발전소는 1929년 착공해 55년 완공됐다. 오랜 세월 런던의 에너지를 책임지다가 83년 가동을 중단했다. 발전소로서의 수명은 다했지만 독특한 외양 덕분에 빅벤·타워브릿지 등과 함께 아이콘(icon) 건축물로 사랑 받았다. 프리즈 아트페어 같은 문화행사도 이곳에서 열린다.
요즘 배터시 발전소는 화려한 변신을 꾀하는 중이다. 지난 10월 템즈강 남쪽(사우스뱅크) 나인 엘름스 지역에 위치한 발전소를 찾았을 때, 요란한 기계음 속에 화물 트럭들이 분주히 드나들고 있었다. 높이 103m에 이르는 굴뚝 위로 뻗은 초대형 타워크레인이 묵직한 자재를 위아래로 실어날랐다. 벽돌 외벽과 굴뚝을 포함한 건물 전체가 단계별로 해체·복원·재조립 중이다. 앞으로 4년 안에 이곳은 오피스ㆍ상점ㆍ주거시설이 밀집한 거대한 복합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 중심에 애플의 영국 사옥 탄생이 있다. 지난해 9월 애플은 “2021년까지 총 90억 파운드(약 13조3000억원)를 들여 새 사옥을 배터시 발전소 안에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전체 부지의 40%(약 4만6000㎡)에 해당하는 6층짜리 건물이 완공되면 런던 각 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 1400명이 모두 옮겨온다. 30여 년간 잠자고 있던 배터시 발전소 일대가 전 세계 시총 1위 기업의 유럽 교두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죽은 도심의 화려한 부활이다.
13조원 투자해 발전소를 ‘해체 재조립’, 신사옥으로
애플은 배터시 입주 계획을 밝히면서 “우리 팀 전체가 한 데서 일하며 역사성 있는 지역의 재생을 돕게 되는 멋진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인한 글로벌 기업 이탈을 우려하던 영국 정부가 축배를 든 것은 물론이다. 필립 해먼드 재무장관은 “영국 경제에 대한 또다른 신임투표”라며 애플과 배터시의 만남에 기대감을 표했다.
배터시 발전소 개발사의 최고경영자(CEO) 롭 틴크넬은 본지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독특한 외관의 건물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 개발 프로젝트의 핵심”이라면서 “리노베이션이 끝나면 방문객, 사는 사람,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굉장한 건물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원형 보존을 위해 네 개의 굴뚝은 전면 해체했다가 부서지거나 칠이 벗겨진 부분을 보수해서 조각품을 복원하듯 재조립한다.
산업혁명을 선도한 나라답게 영국의 도심 산업시설은 수준 높은 디자인과 설계시공으로 유명하다. 이 근대 문화유산을 새 시대의 요구와 안목에 맞게 탈바꿈시킨 ‘도심 재생’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테이트 모던이다. 테이트 모던은 1940년대 건설돼 배터시와 쌍벽을 이뤘던 화력발전소 뱅크사이드를 개조해 2000년 현대 미술관으로 거듭 났다. 두 건축물의 적갈색 벽돌 외관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같은 사람이 설계했기 때문이다. 바로 런던을 대표하는 빨간 전화박스를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 건축가 자일스 길버트 스콧이다.
테이트 모던은 연 500만 명이 방문하는 런던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지만 지역 경제 차원에서 보면 단일 미술관이라는 한계가 있다. 반면 배터시 프로젝트는 나인 엘름스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경제 활성화를 목표로 한다. 실제로 발전소 부지를 개발해 조성한 초호화 주거시설은 홍콩 등 아시아 부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분양을 전담하는 BPS 에스테이트의 직원은 “신축 아파트 3400여 채 가운데 1차 분양분 865채가 완판됐고 대부분 입주를 마쳤다”고 말했다. 이곳 펜트하우스는 최고가 600만 파운드(약 90억원)에 이른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와 건축사무소 포스터스앤파트너스가 설계한 기하학적 유선형의 고급 아파트들 분양도 착착 진행 중이다.
‘일자리 2만개 창출’ ‘음식점 250여개 신설’ ‘1300만 파운드짜리 의료시설 신설’…. 배터시 공사장을 둘러싼 펜스에 적혀있는 ‘배터시 2025 비전’ 내용이다. 탁월한 입지 경쟁력에 주목한 미국대사관과 네덜란드대사관 등이 줄줄이 옮겨오고 있다. “2012 런던올림픽 때 (북부) 스트랫포드 재개발을 뛰어넘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재생안”(영국 일간지 가디언)이다. 틴크넬 CEO는 “밀레니엄 이후 첫 지하철 신설(노던라인 연장) 등 총 200억 파운드 규모 경제효과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구글·페이스북도 런던에 사옥…기업이 이끄는 도시 재생
이런 도시 재생은 개발 주체와 시 당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야 성공할 수 있다. 원래 런던은 도시의 역사성 및 경관 보존을 위해 건물에 엄격한 고도제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행정규제 또한 까다롭기 짝이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낙후된 도심 재개발에 발벗고 나서면서 규제에 유연성을 높이고 있다. 런던에서 만난 건축설계사무소 TP베네트의 도시계획담당 도널드 콘시다인은 “카운슬이 자체 개발 계획에 따라 기업을 유치하면, 런던 시당국도 개발에 따른 공공 기여를 감안해 가이드라인을 탄력 적용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거대 기술 기업 사옥 유치는 런던 도심 재생의 노림수다. 양질의 일자리를 갖춘 기업이 들어서는 것 자체가 해당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킹스 크로스 역사 인근에 구글 런던 사옥이 문을 연 것도 그런 사례다. 구글은 곧바로 2018년 제2ㆍ제3사옥을 착공한다는 안을 발표하면서 현재 런던 직원 4000명 외에 3000명을 추가로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9만3000㎡ 규모로 옥상정원 등을 갖춘 현대적 신사옥은 킹스 크로스의 지역 특성을 살리면서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구글 스타일을 구현할 전망이다. 앞서 페이스북도 유스틴역 브룩 스트리트에 사옥을 건립하고 직원을 500명 늘린 1500명 규모로 운용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글로벌 신사옥 유치가 건설경제 부양과 함께 고소득 일자리 창출의 효과도 낸다는 의미다.
업계에선 애플ㆍ구글ㆍ페이스북이 잇따라 런던 사옥을 신설하는 것은 브렉시트 위기에도 영국 경제에 대한 신뢰가 탄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은 “런던이 세계 최대 기업에 개방돼 있을 뿐 아니라 무역과 투자를 이끄는 도시임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평했다. 런던에서 금융컨설팅 업체 JTS 파이낸셜을 운영하는 최요순 대표는 “사무용 부동산을 임차할 때 10년에서 25년까지 장기 계약이 가능하단 점 등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의 사옥 유치를 통한 도시 경쟁력 강화라는 ‘재생 모델’은 세계 주요 도시를 자극하고 있다. 최근 아마존이 제2사옥 건립 계획을 밝히자 뉴욕ㆍ시카고ㆍ애틀란타 등 미국 주요 도시가 ‘수주 경쟁’에 뛰어들었다. 아마존이 50억 달러(약 6조6500억원)를 투입할 신사옥은 해당 도시에 평균 연봉 10만 달러의 일자리 5만여개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기업이 도시 경쟁력이다.
런던 글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진 심형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