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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폐, 공포는 신장 해쳐 지진 후유증 한방으로 해소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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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호 24면

[新동의보감] 천재지변과 심신 치유

지진멀미, 정신불안 등 지진으로 인한 여러 가지 증상을 완화하는 데 한약은 매우 유효하다. [중앙포토]

지진멀미, 정신불안 등 지진으로 인한 여러 가지 증상을 완화하는 데 한약은 매우 유효하다. [중앙포토]

지난 11월 15일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남송리에서 발생한 규모 5.4의 지진으로 인해 피해지역 주민들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여진(餘震)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경주 지진에 이어 관측 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지진이라고 하니 놀랄 만도 하다.

복령·계지·백출·감초 배합 #영계출감탕 지진멀미에 효과 #반하·후박·복령·소엽 섞은 #반하후박탕 마음 안정에 도움 #사소한 일에도 초조해지면 #간의 항진 억제하는 억간산을

평소 지진 안전지대라 여겨졌던 한국인지라 지진과 건강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지만, 지진 다발지역인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많은 연구와 임상 사례가 축적되어 있다. 큰 지진이 발생하면 지진멀미, 피로감, 불면증, 식욕부진, 정서불안 등 신체의 부조화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이 생긴다. 지진멀미는 의학적인 정의는 아니지만, 지진이 멈춘 상태에서도 땅이 계속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어지러우며 두통과 구토 증세를 느끼는 것을 말한다.

지진 피해를 당하면 심리적으로 다양한 감정적 변화가 극심하게 일어나는데, 이는 신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지진으로 인해 가족이나 친지를 잃거나 상처를 당하면 우선 슬픔이 찾아든다. 한의학적으로 보면 슬픔은 폐의 건강과 관련이 있다. 공포는 신장을 해치고 분노는 간을 손상시킨다. 그리고 고민은 비장(脾臟)을 다치게 한다. 이처럼 지진으로 인해 슬픔·공포·분노·고민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 단기간 내에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몰려들면 건강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지진으로 인한 여러 가지 증상을 완화하는 데 한약은 매우 유효하다. 예컨대, 지진이 멈춘 후에도 몸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되는 지진멀미에는 영계출감탕(桂朮甘湯)이 효과적이다. 복령(茯), 계지(桂枝), 백출(白朮), 감초(甘草)를 배합하는 영계출감탕은 담음(痰飮)으로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우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찬 증상에 쓰는 동의보감의 처방이다. 신경쇠약, 심장조동, 갑상선 기능 항진증, 만성 신염 등에도 쓸 수 있다.

밤이 되면 불안한 기분이 계속 들고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에게는 시호계지건강탕(柴胡桂枝乾薑湯)을 처방한다. 시호계지건강탕은 신경이 과민한 상태가 되어 신체나 정신 상에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에게 사용하는 한약이다.

심신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안정한 정신상태가 지속되면 몸속에서 기(氣)의 흐름이 정체된다. 그렇게 되면 목이 막히거나 가슴이 죄여 잠을 못 자는 증상이 나타난다. 시호계지건강탕은 염증을 억제하면서 기의 흐름을 좋게 만드는 작용을 하므로 신경과민에 따른 각종 증상을 개선시킨다.

지진멀미의 처방은 환자에 따라 다르지만, 불안이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에는 몸의 수분대사가 떨어지고 신체가 차가워지는 경향이 많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이러한 증상을 완화하는 데에는 반하후박탕(半夏厚朴湯)이 효과적이다.

반하후박탕은 반하(半夏), 복령(半夏), 후박(厚朴), 소엽(蘇葉), 생강(生薑) 등 대략 5가지 생약을 적절하게 섞어 처방한다. 참고로 반하에는 진해(鎭咳)와 거담(去痰)작용이 있고, 복령에는 이뇨(利尿)와 진정(鎭靜)작용이 있다. 후박은 긴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고, 소엽은 정신을 안정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생강은 발한(發汗)과 건위(健胃)작용을 한다. 이들 생약의 진정작용, 정신안정작용, 긴장완화작용 등으로 몸을 편안하게 만들고 기분을 가라앉혀 신경증이나 불면증에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 구토를 가라앉히는 진토(鎭吐)작용, 담을 뱉도록 도와주는 거담(去痰)작용, 위의 소화기능을 높이는 건위(健胃)작용을 하기 때문에 기침이나 위염, 입덧 등에도 효험이 있다. 반하후박탕은 특히 목에 뭔가 걸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신경증상에 효과적인 처방이다.

서양의학에서는 지진 등으로 인한 불안 증상에 항불안제(抗不安劑)를 단기간 복용하게 한다. 항불안제는 불안감을 무리하게 억제하는 경우가 많고 졸음을 초래한다. 하지만 한약은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고 부작용이 작은 편이다. 한약을 계속 복용하면 마음의 긴장이 풀려 편안한 상태가 된다.

국내에서는 양한방 간 ‘밥그릇 싸움’으로 인해 일각에서 한약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있지만, 외국에서는 한약의 뛰어난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지진이 많은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심료(心療)내과나 정신과 의사들이 임상에서 한약을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일본동양심리의학연구회’ 등의 학술단체도 조직되어 한약의 유효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비단 지진으로 인한 후유증뿐만 아니라 가족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거나 사회적으로 대인관계가 나빠지는 등의 이유로 인해 일시적으로 불안감을 호소하는 경우는 누구라도 있을 수 있다. 불안 자체는 병이 아니다. 불안은 외부의 적이나 재해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게 된 중요한 감정의 하나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만큼 불안감이 커지면 향(向)정신약이나 인지요법(認知療法)의 대상이 되지만, 그 이전의 불안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한의학에는 건강한 상태는 아니지만 아직 발병하기 전 단계를 ‘미병(未病)’이라고 하는데,  증상이 심화되어 병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누그러뜨리는 것도 한의학적 치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일상의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초조해하거나, 기분이 고양되어 잠을 잘 못 자는 사람들에게 처방하는 한약으로는 억간산(抑肝散)이 있다. 한의학에서는 간(肝)의 기운이 항진되면 분노와 초조함이 나타난다고 판단한다. 억간산이라는 이름에는 간의 항진을 억제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어린아이가 밤에 자지 않고 울거나 경기를 할 때도 이 약을 처방한다. 평소 화를 잘 내거나 흥분을 잘하고 초조해하는 성인들의 신경증상에도 억간산을 사용한다. 구체적으로는, 신경증, 불면증, 이갈이, 갱년기장애 등의 증상을 완화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백출(白朮), 복령(茯), 천궁(川芎), 당귀(當歸), 시호(柴胡), 감초(甘草) 등을 조합하여 만드는 억간산은 본래 밤에 잠을 못 자 울어대거나 짜증을 부리는 아이들을 위한 처방이지만 분량을 조절하여 성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 최근 연구에서는 진행 중인 ‘알츠하이머형 인지증(認知症)’에서 일어나는 망상이나 배회, 폭력 등을 억제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진으로 인해 일시적인 심리적 불안을 느낄 때는 큰 대(大)자로 누워 복부까지 숨을 들이쉬는 느낌으로 심호흡을 하거나,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다. 지진멀미가 난다고 해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어지럼증이 더 심해지므로 맨손 체조를 하거나 산책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증상이 빨리 가라앉는다.

정현석 약산약초교육원 고문
튼튼마디한의원 인천점 원장. 경희대 한의과 박사. 경남 거창 약산약초교육원에서 한의사들과 함께 직접 약초를 재배하며 연구하고 있다. 『신동의보감육아법』『먹으면서 고치는 관절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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