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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낮추면 실망도 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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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중국이 8개월간 꽁꽁 묶어 둔 한국행 단체 관광객의 발을 풀었다. 풀긴 풀었지만 ‘찔끔’이었다. 10·31 한·중 관계 개선 합의 이후 전면 해제를 바란 국민 기대엔 한참 못 미쳤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있음은 기사에 달린 댓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부는 10·31 합의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는 ‘봉인’됐다고 홍보했다. 다시는 중국이 사드를 거론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보복조치 해제도 시간 문제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 이후 돌아가는 모양새는 누가 봐도 ‘봉인’이라 하기 힘들다. 시진핑(習近平) 주석·리커창(李克强)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사드를 거론했고,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일장훈시에 가까운 어조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몰아붙였다. 중국은 사드를 덮어 둔 게 아니라 사드는 사드대로 문제를 풀어 나가면서 차근차근 막혔던 교류를 재개해 나가자는 의도로 보인다. 중국 외교관이 “왜 자꾸 봉인이란 말을 쓰느냐”고 항의해 왔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입장 차이가 왜 이렇게 벌어졌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중국 측이 협상장에선 봉인에 동의했다가 그 뒤 말을 바꿨을 가능성이 그 첫째다. 그게 아니라면 중국은 봉인에 동의한 적이 없는데 우리 정부 당국이 잘못 알아들었거나 과잉해석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빠져 상대방의 진의를 잘못 읽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중국 측 설명대로라면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우리 측이 봉인이라고 말한 근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외교 협상장에서 오간 대화가 공개되지 않는 한 누구 말이 맞는지 알 길이 없지만 진실은 그 둘의 중간쯤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도 있다. 10·31 합의를 사드 봉인으로 해석한 정부 설명은 한·중 관계 복원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부풀렸지만 상대방은 그에 부응할 준비가 덜 돼 있다는 점이다.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문 대통령의 국빈 방중을 실무적으로 준비 중인 이들의 전언도 그렇다. 우리는 대통령 방중을 최대한 화려하게 포장해 관계 복원의 증표로 삼고 싶어 하지만 상대방은 우리의 의욕 과잉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중국 측 카운터파트 사이에서 실무진이 속만 태우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럴 때는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게 상책이다. 박근혜 정부 때 한·중 관계가 롤러코스터를 탄 원인도 따지고 보면 중국에 너무 기대를 걸었다가 그게 이뤄지지 않자 실망한 탓이 크다.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고, 그것이 다시 악감정으로 증폭돼 상대방의 객관적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愚)를 되풀이하지 않아야겠기에 하는 말이다.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