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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 권진규|"작품교섭 받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던 모습 눈에 선해"|이규호 서양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나와 권진규는 그가 귀국 후에 가진 세번째 개인전(명동화랑)때에 더욱 가까워 졌으며 그후 본인이「자신의 목숨은 자기 스스로가 다스린다」고 입버릇처럼 하면서 끝내 이 세상을 하직할때까지 동선동 아틀리에에 자주 드나들며 깊은 친분을 맺게 되었다.
1973년초 고려대학교에서 현대미술 실을 창설할 당시작품수집의 일을 맡았던 나는 주저 없이 권진규의 조각작품을 교섭하게 되었다. 이번 회고전(호암갤러리)에 출품된 붉은 가사를 걸친 자각상과 마두상등 3점은 그의 아틀리에에서 내가 직접 추려낸 작품들이다. 나는 지금도 이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그 당시 권진규의 소박한 모습이 생각나 감회를 새롭게 하곤 한다. 그는 작품교섭을 받고『고려대학교에서 내 작품을 수장한대, 그리고 돈도 준대…』라며 더없이 기뻐하더라는 것이다.
말수가 적으며 무표정하고 멍청한 것 같이 보이면서도 빛나는 눈동자에 애무 어린, 그러나 투시하듯 예리한 관찰력을 지닌 그는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과정을 직접 작품에 연결시켜 조형화 작업에 임했다.
그가 귀국하여 선언하듯 말하던『한국에서 진정한 리얼리즘을 정립해야 한다』는 발언대로 그의 작품에서 역력히 형성된, 그러나 통속적 사실주의가 아닌, 이른바 내면적 리얼리즘이라할 인간의 내적인 진수가 예리한 그의 관찰을 통하여 밖으로 솟아 나오는 듯 보는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작품 표면에서 볼 수 있는 흙 붙임을 세밀히 살펴보면 거칠게 다루어진 여인두상(소품 바라코타)등에서도 그의 기법의 특이한 날카로움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대담하게 생략된 부분처리와 조용한 동양적 조형질서의 추구, 그것은 소위「로댕」 -「부르델」에서 그의 지도교수(청수)를 거쳐 그에게 이어진 부수기법에서 부단한 자기투입을 통하여 이룩된 그의 집념의 결실이며, 또 여기에 권진규조각의 본질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권진규의 생활은 작품하는 것이 전부였다. 생활이 작품과 혼연일체로 형상화됨으로써 그의 겸허하고 진지한, 또 지적이며 고귀한 체취는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옮겨진 것이다. 그가 조각가로서 내심 원하고 있었을 기념비적 대작하나가 서울거리 어딘가에 세워졌더라면 열마나 좋았을까 못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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