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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뿌리…한국문화 제2부<6>| 향천 살아 숨쉬는 고려·조선불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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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고려 충렬왕 때 화원> 동국대 일본중국-사국 지방 학술기행 장충식 <동국대 교수·미술 사학>
출우사의 고려범종 조사를 마치고 서둘러 산을 내러오니 점차 안개가 걷히고 쾌청한 날씨가 되었다. 산상에서는 안개와 구름이 오락가락하여 범종탁본에 여간 애를 먹지 않았는데 산아래 오슈 (대주) 성엔 따가운 햇볕이 작열하고있었다.
먼저 대주시 교육위원회 「무라카미」(촌상항부) 과장을 만나 강항 유적과 대주성을 조사하였으며 또 15km지점의 「가메오카」(귀강)가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 왕자가 입었던 옷과 궁중에 있던 종을 보관하고 있다기에 잔뜩 기대를 걸고서 안내를 받아 갔다. 그러나 옷은 일본식으로 이미 개조되었고 비단의 문양이나 직조방식은 대륙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나 연대는 임난 당시까지 올리기 곤란하였다. 그리고 작은 종 역시 일견하여 우리의 종은 아니고 차라리 중국계에 가까왔다.
다음날부터는 우와지마 (우화도)와 마쓰야마 (송산)·이마바리 (금치), 심지어 오미지마 (대삼도) 일대에 걸친 박물관과 사원을 계속 조사하였으나 이렇다 할 새로운 자료를 얻지 못하고 점차 맥이 빠질 즈음 가가와 (향천) 지구에서 고려 및 조선시대 전기의 불화를 만나는 환희의 시간을 가졌다. 금치역에서 15시15분발 고속행 보통열차를 타고 17시40분, 중간지점인 관음사 시에 도착하였다.
관음사는 시의 서북쪽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였는데 이 시는 동서로 놓인 사누키(독기)산맥의 동족에 위치한 평온한 도시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특기해야할 것은 일본의 저 유명한 홍법대사가 바로 이곳 독 기인이란 점이다.
그는 이 아름다운 섬 사국을 순회하면서 88영양을 마련하였는데 오늘날도 이 성소에 대한 순례가 끊이지 않으며, 관음사 역시 홍법대사의 영양 가운데 68번과 69번의 일사이곽장을 지닌 사국 유일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 절은 본래 일증이란 승려가 개산하여 신궁사로 전래되었으나 서기 806년 홍법대사가 제7대 주지로 부임하여 관음사라 개칭한 절이다.
먼저 관음사에 들러 주지승「하바라」씨 (우원공도) 를 만나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하였더니 자기는 불화에 대하여잘 알지 못하나 이 지역 일대의 불상과 불화를 잘 아는「다케다」 씨 (무전화소) 를 소개해주겠다는 반가운 제의를 받았다. 전화가 통해져「다케다」씨가 관음사로 오는 도중에「하바라」씨가 내놓은 불화는 지장후불정 이었다.
본존불의 앉은 자세는 반가부좌의 특이한 형태에 오른손을 들어 보주를 잡았고 왼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놓았다. 본존의 좌우 협시보살 가운데 도명존군가 석장을 지녔는데 이런 형식은 원래 고려불화에 존재하고 조선불화에서는 아주 드문 형식이며 왕난 전까지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이 불화의 연대설정에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두 협시 곁에는 사자가 있고 그 뒤목에는 십대왕을, 또 그 뒤로는 채운을 그려 구도를 달리한 가운데 여섯 보살을 배치하였다. 이 불화는 고려시대의 일동구도를 기본으로 삼았던 형식에서 그 구도가 무너지면서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새로운 자료로 판단되었다.
또한 조선후기 지장탱화와도 구도적 측면에서 다른 귀중한 자료지만 아래에는 화기를 기록하지 않고 공간으로 남겨두어 그 조성 연유를 알 수 없음이 아쉬웠다. 불화의 크기는 높이 1백3cm, 폭95cm의 아담한 그림이었다.
불화를 조사하는 동안「다케다」씨가 도착하여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불화는 l6세기께의 조선불화로 짐작되며 지장시왕도 (십왕도) 라 했다. 16세기로 보는 견해는 큰 차이가 없으나 시왕도 이기보다는 지장후불정이라 해야 할 것 같았고 또 그 조성 역시 왕난 이전에 제작되었다가 곧 왜구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것은 그림 아래쪽에 화기를 적지 못한 채 그대로 공간을 남겨 둔 것이 어쩌면 그림의 약탈과도 관계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같은 이야기들을 「다케다」씨와 자세히 나눌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곧 다른 지역의 불화 안내에도 길잡이가 되겠다는 제의에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기도 했다. 「다케다」 씨는 이곳 일대의 유적·유물과 도로망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를 만난 이후의 조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그의 승용차로 오후 늦게까지 무려 3곳의 불화를 더 조사할 수 있었다. 그는 미리 전화를 걸어 그곳에 도착하면 곧 조사할 수 있도록 준비케 하였으므로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었다.
「다케다」 씨의 안내를 받아 먼저 도착한 곳은 관음사에서 승용차로 약15분 거리인 추원사였다. 이 절은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의 깨끗한 절이었다. 마침 주지승은 화단의 정리작업을 하고 있다가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추원사는 상당수에 달하는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곳에는 자료관 형태의 전시실을 별도로 건립하여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다. 복잡하게 전시된 유물들 가운데서 우리의 것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물장 속의 금강간과 같은 불패도 우리의 냄새가 나는 듯 했지만 확정할 근거가 없고「다케다」씨가 안내한 불화 앞에다가 섰을 때 필자는 너무나 눈에 익은 우리의 고려불화 그 특유의 색채에 가슴이 뛰고 있었다.
이 외딴 섬, 머나먼 남쪽 무명의 사원에 우리의 보배로운 고려불화가 간직돼 있고 그 불화 앞에 필자가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뭐라 형언키 어려운 흥분과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 경건한 자세로 불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화의 크기는 높이 110·8cm, 폭 50·3cm로서 아미타여래 내영도였다. 약간 오른쪽으로 돌린 근엄한 얼굴은 가볍게 아래로 주시하였으며 신체도 약간 틀어서 동적인 분위기를 나타냈다. 아름다운 법의를 걸치고 왼손은 어깨부분까지 들었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자연스런 포즈를 취하였는데 이는 곧 고전적 춤의 율동미를 두 손끝에서 마음껏 구사하는 느낌이었다.
본래 아미타래영도는 선업을 지어 극락에 왕생하는 중생들을 아미타불이 맞이하는 형태를 표현한 것인데 곧 고려불화의 종교적 승화가 이 그림 속에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이들 내영도의 형식은 이곳 추원사의 경우와 같이 아미타 단독의 그림, 또는 아미타 삼존의 형식, 그리고 팔대 보살을 협시로 하는 구조도 라든지 여러 성중을 거느리는 등 몇 가지 형식으로 전개되지만 이곳에서는 단독상으로 표현되었다.
단독상의 대표적 그림은 1286년(충렬왕 12년) 자회라는 화원이 그린『아미타래영도』(일본은행 소장) 가 이미 알려져 있는데 이들 두 그림을 비교할 때 그 구도에 있어서는 양자가 거의 동일한 형식아래 전개되었으므로 어느 것이 선행한 모본인지 금방 판단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다만, 법의의 처리가 아름다운 금선의 모양을 나타내는 등 고려불화 특유의 형식을 간직하고 있지만 추원사의 작품이 자회그림 보다 더욱 부드럽고 율동적이란 지적이 가능했다.
여기서 말하는 율동적이란 표현은 자회의 내영도가 다소 둔중하면서 딱딱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음에 비하여 추원사의 불화는 보다 가벼우면서 날렵한 감각을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비교를 통하여 추원사의 작품은 당시 유행하였던 자회필과 같은 아미타래영도의 형식을 그 자본으로 한 후대 작품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라고 해서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세련되고 재치있는 필치로 봐 자회필의 내영도보다 성공한 명품으로 생각되었다.
일본의 고대문화가 우리나라와 같은 대륙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임난 당시까지만 해도 전적으로 반도의 유품이 문화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현존 유품에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지만 특히 불화나 대장경의 경우 전적으로 우리의 것에 의존하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국내의 현존 고려불하가 희귀하고 또 조선시대 전기의 불화가 거의 없는 지금으로서는 이번에 확인된 이들 새 자료에 대한 조사·연구가 이룩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세토나이카이 (나호내해) 해로상에 전개된 우리 문화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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