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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낳고도 엔진 소리 그리워 일찍 복귀, 순발력 좋은 여성에게 기장은 좋은 직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 최초 A380 여성 기장인 황연정씨가 세계지도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최정동 기자

한국 최초 A380 여성 기장인 황연정씨가 세계지도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최정동 기자

훤칠한 키에 긴 머리, 시원스런 비주얼에 항공사 유니폼. 미모의 여승무원(스튜어디스)이라고 ‘착각’ 하기에 딱이다. 이런 모습의 여성에게서 객실승무원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껏 우리의 경험은 대부분 거기에 머물러 있으므로.

황연정(44) 대한항공 기장은 이런 선입견을 과감하게 때려 부순다. 대한민국 3호 여성 기장이자, 국내 최초 민항기 부부 기장, 21년차 베테랑.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황 기장은 여기에 기록 하나를 더 얹었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A380 여기장’.  A380은 현재 전세계에서 운항되는 가장 큰 항공기로 한국에선 유럽, 미주 등 장거리 노선을 다닌다.  ‘하늘을 나는 호텔’로 불리는 A380은 대한항공이 10대, 아시아나가 6대를 운항중이다. 대한항공은 123명의 기장이, 아시아나는 85명의 기장이 번갈아 A380을 몰고 있다.  국내 A380 기장 208명 중 홍일점이 황 기장이다.

황기장은 국내 208명의 A380 기장 중 유일한 여성이다. 쌍둥이 엄마이기도 한 그는 "힘들 때는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황기장은 국내 208명의 A380 기장 중 유일한 여성이다. 쌍둥이 엄마이기도 한 그는 "힘들 때는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그는 10년간의 부기장 생활을 거쳐 2008년 기장이 됐다. 2013년 A380 기장 교육 과정에 입문했고,  2014년  A380 기장이 됐다. 지난해 비행 1만시간을 돌파한 그는  A380 기장 5년차에 접어든 올해 5000시간 무사고 기록을 일궈 사장 표창을 받았다.

면면이 베테랑 기장인 그이지만 세련된 외모에서 비치듯 대학시절  스튜어디스를 꿈꿔 대한항공 인턴승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비행기 견학 때 우연히 앉게 된 조종석에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순간 가슴이 뛰었고 ‘내가 갈 길이다’고 생각했다”며 “조종훈련생 때 그때 그 비행기의 기장님을 담당 교관으로 만났는데 잠깐 스쳐간 저를 기억하시며 ‘그때 난 니가 기장이 될 줄 알았다’고 하시더라”며 웃었다.

9일 오후 서울 이태원 한 식당에서 대한항공 여성조종사들이 정기 모임을 참석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황연정(뒬줄 가운데 흰색 셔츠) 기장은 이 모임에서 큰 언니 역할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9일 오후 서울 이태원 한 식당에서 대한항공 여성조종사들이 정기 모임을 참석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황연정(뒬줄 가운데 흰색 셔츠) 기장은 이 모임에서 큰 언니 역할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쌍둥이 엄마라고 들었다. 일과 육아의 병행이 어렵지 않나.
“조종훈련생 동기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같은 직업이라 서로 이해하는 폭은 깊었지만 훈련과 비행이 반복되는 일상은 바빴다. 아이 갖는 과정이 쉽지 않아 시험관 시술로 쌍둥이를 출산했다. 처음엔 혼자 해 보려 했지만 곧 안 된다는 걸 알았고 이후엔 남편과 번갈아 휴가를 받고 친정 어머니 도움을 받아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무엇보다 ‘나는 다른 엄마들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아이들에게 확실하게 말해주고 자신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해 왔는데 나름대로 효과를 내고 있다.”

-출산휴가 중간에 복귀했다고 들었다.
“임신을 알게된 순간부터 휴직이 가능했다. 그런데 임신-출산 휴가 20개월째에 들어설 무렵 비행기 엔진 소리가 그리워졌다. 빨리 일터로 복귀하는 게 나나 가족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남성들 일색인 조종석이 힘들지 않았나.
“조종석은 남녀 차별이 없다. 조종석 안에 들어가는 순간 남녀의 구분이 없고 단지 기장과 부기장의 업무 차이만 있다. 남성이 잘 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여성이 잘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섬세하고 순발력이 좋은 게 장점이다.”

 -그래도 여성이라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훈련생 시절 막바지 속초 비행장에 착륙하는데 유리창에 새가 부딪쳐 머리가 깨지며 피가 확 튀었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는데 기장님이 ‘놀라도 마음속으로 놀라되 절대 티를 내지 마라. 니가 사람들에게 안심을 줘야 한다. 대담한 척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직도 그 얘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A380 조종사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몇차례 응급 환자가 발생했을 때 의사 승객 등과 함께 위기를 극복했던 일들과 저의 기내 안내방송을 듣고 ‘여성 기장님, 힘내시라’는 메시지가 여러분에게서 전해졌던 점 등이다.”

그는 다시 태어나도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정년을 꼭 채우고 싶다는 그에게 조종사는 천직으로 보였다. 기장을 꿈꾸는 여자 후배들에게 줄 조언을 구했다.
그는“조종사로 입사했을 당시 고 조중훈 회장께서 ‘조종사도, 엄마로서의 삶도, 아내로서의 삶도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가장 와 닿는 말이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되 여성의 강점인 승객들과의 소통을 중시한다면 대형비행기인 A380도 거뜬히 몰 수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가영 기자 ide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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