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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도 식후경 … 안데스 산맥 ‘고도 요리’에 반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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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호 08면

페루 파차카막(Pachacamac) 유적지 인근에 있는 생태 레스토랑 ‘차크라(Chaxras)’의 텃밭. 요즘 페루 식당에서는 텃밭에서 갓 수확한 식재료로 요리하는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이 인기다. ⓒAPEGA

페루 파차카막(Pachacamac) 유적지 인근에 있는 생태 레스토랑 ‘차크라(Chaxras)’의 텃밭. 요즘 페루 식당에서는 텃밭에서 갓 수확한 식재료로 요리하는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이 인기다. ⓒAPEGA

‘빠빠(Papa).’

세계인이 인정한 #‘최고의 미식 여행 국가’ 페루

아기 옹알이 같은 이 소리, 페루 밥상에서는 흔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쌀과 같은 존재, 감자를 일컫는 스페인어다. 일품 요리를 주문하면 접시 한 쪽을 늘 차지하고 있다. ‘그래 봤자 감자’라고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종류만 3000가지다. 모양과 색뿐 아니라 맛도 다르다. 해발 5000m에 달하는 안데스 산맥의 다양한 높낮이(高度) 덕에 페루에서는 ‘오렌지 빛깔의 버터 맛 나는 감자’도 자란다.

감자만이 아니다. 페루는 가히 식재료 천국이다. 아마존의 열대우림과 강, 태평양의 너른 바다, 안데스의 고산지대와 사막이 있다. 미지의 식재료가 넘쳐나고, 페루 출신 셰프들도 그 가치에 눈떴다. 둘의 번쩍이는 시너지가 ‘페루 뀌진(Peru Cuisine)’을 만들고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중앙SUNDAY S매거진이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5일까지 페루 수도 리마에서 열린 남미 최대 미식축제 ‘미스투라(Mistura)’에 다녀왔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지구 반 바퀴를 도는 기나긴 여정 끝에 도착한 페루의 레스토랑에서는 놀라운 생태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맛의 신대륙이었다.


리마에 있는 수르키요 재래시장의 모습

리마에 있는 수르키요 재래시장의 모습

미식 축제 ‘미스투라’의 장터에서 볼 수 있는 식재료 ⓒAPEGA

미식 축제 ‘미스투라’의 장터에서 볼 수 있는 식재료 ⓒAPEGA

페루의 감자. 종류만도 3000가지가 넘는다. ⓒAPEGA

페루의 감자. 종류만도 3000가지가 넘는다. ⓒAPEGA

페루 식도락 여행은 ‘메르카도(Mercadoㆍ시장)’에서 시작해야 한다. 수도 리마의 경우 수르키요(Surquillo) 재래시장부터 둘러보는 게 좋다. 잉카 문명의 중심지이자, 마추픽추 트래킹의 거점 도시인 쿠스코에서 수확한 각종 칠리, 아마존의 열매들과 카무카무ㆍ퀴노아ㆍ루쿠마 등 다양한 슈퍼푸드를 볼 수 있다. 마늘 한 톨처럼 큰 옥수수 알갱이, 양배추만한 브로콜리 등 익숙한 채소들의 ‘슈퍼 사이즈’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페루관광청의 이본느 파라는 “페루의 정치ㆍ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을 때는 자유로운 이동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안정화된 지금은 페루의 맛이 모두 수도 리마로 집결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덕에 마추픽추의 대명사 페루는 이제 세계에서 알아주는 미식 국가가 됐다. 국제관광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월드 트래블 어워즈(WTA) ‘최고의 미식 여행지’ 부문에서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2월 베트남에서 열리는 올해 시상식에도 역시 후보로 올라 있다.

리마에 있는 레스토랑 ‘센트랄’에서 맛 본 17개의 고도 요리 중 하나. 해발 180m ‘사막 식물’을 표현했다. ⓒAPEGA

리마에 있는 레스토랑 ‘센트랄’에서 맛 본 17개의 고도 요리 중 하나. 해발 180m ‘사막 식물’을 표현했다. ⓒAPEGA

해발 4100m ‘안데스 산맥’ 요리. 돼지고기 위에 슈퍼 곡물 ‘까냐후아’로 만든 칩을 올렸다. ⓒAPEGA

해발 4100m ‘안데스 산맥’ 요리. 돼지고기 위에 슈퍼 곡물 ‘까냐후아’로 만든 칩을 올렸다. ⓒAPEGA

‘평생 먹어본 적 없는 음식’ 만드는 센트랄

해저 10m 바위 생태계를 요리로 재현한 ‘바위 연체동물’ ⓒAPEGA

해저 10m 바위 생태계를 요리로 재현한 ‘바위 연체동물’ ⓒAPEGA

‘센트랄’의 오너 셰프 비르힐리오 마르티네스 ⓒAPEGA

‘센트랄’의 오너 셰프 비르힐리오 마르티네스 ⓒAPEGA

해발 3900m ‘고귀한 안데스’. 쿠스코의 안데스 산맥에서 가져온 감자로 만들었다. ⓒAPEGA

해발 3900m ‘고귀한 안데스’. 쿠스코의 안데스 산맥에서 가져온 감자로 만들었다. ⓒAPEGA

무궁무진한 식재료가 있다 해도 발굴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일터. 요즘 페루의 젊은 셰프들은 그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 “페루에서 나는 식재료를 존중하고 지키고 싶다”며 앞다퉈 메뉴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붐을 일으킨 것은 페루의 ‘국민 영웅’이자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셰프 가스통 아쿠리오(Gaston Acurioㆍ50)다. 1994년 문 연 그의 레스토랑 아스트리드&가스톤이 2011년 세계 음식ㆍ외식 업계 전문가들이 뽑는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에 44위로 기록되면서 세계인의 이목이 쏠렸다. 올해의 경우 센트랄(5위), 마이도(8위), 아스트리드&가스톤(33위) 등 3개의 레스토랑이 순위권에 올랐다.

이 중 한 군데를 추천한다면 단언컨대 ‘센트랄’이다. 이번 미식 투어에서 함께 했던 영국ㆍ독일ㆍ스페인ㆍ이탈리아ㆍ호주 기자들이 “차원이 다른 요리, 평생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이라며 1위로 꼽은 레스토랑이다. 이곳의 오너 셰프인 비르힐리오 마르티네스(Virgilio Martnezㆍ40)는 올 초 미국 넷플릭스의 음식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 시즌 3에 출연하기도 했다. 분기 별로 한 번 예약 받지만, 늘 꽉 차 있는 그의 레스토랑에 가면 11개 또는 17개 코스의 시작을 이렇게 알린다. “17개(또는 11개)의 페루 고도를 경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첫 접시 ‘바위 연체동물(Rock Molluscs)’은 해저 10m 바위 생태계를 그대로 옮겨놨다. 해조류로 만든 바삭한 칩에 따개비와 홍합을 다져 만든 소스를 얹어 먹는다. 해발 1900m 지대를 뜻하는 ‘하이 정글(High Jungle)’에서는 카카오계 열매인 마캄보(Macambo)로 만든 빵을 맛본다. 고도 300m 쯤에는 나나이(Nanay)강이 있는데, 그 강에서 잡은 식인 물고기 피라냐 껍질튀김과 속살 고로케가 등장한다. 가장 높은 곳의 요리는 해발 4100m의 ‘안데스 산맥(High Andes Mountains)’으로 돼지고기가 나온다.

해발 450m의 ‘나나이 강’. 아마존 강에서 잡은 피라냐의 껍질 튀김을 피라냐를 데쳐 얼려 만든 접시 위에 냈다. ⓒAPEGA

해발 450m의 ‘나나이 강’. 아마존 강에서 잡은 피라냐의 껍질 튀김을 피라냐를 데쳐 얼려 만든 접시 위에 냈다. ⓒAPEGA

고도별 식재료로 요리, 한 접시에 생태계 담아

해발 3700m 호수에서 채취한 초록 박테리아 알갱이(쿠슈로ㆍCushuro)가 레몬 슬러시 디저트 위에 뿌려지기도 한다. 지역에서 약으로 쓰였던 알갱이를 씹으면 톡 터지지만,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르티네스는 “페루를 이해하려면 모든 재료를 맛보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페루 전역을 여행하며 식재료를 연구하고, 현지 생산자와 센트랄을 바로 연결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가 꼽는 페루 요리의 정수는 “다양성(Diversity)”이고 그의 요리 철학은 “한 접시에 한 생태계를 담아내는 것”이다. 그는 이 고도 요리로 페루의 지도를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완성했다.

센트랄에서는 한국인 셰프 정상(29)씨도 3년째 일하고 있다. 그는 네 명의 수 셰프 중 한 명이다. 그가 경험한 센트랄은 “페루의 풍경을 끌어와 감성을 자극하는 곳”이다. “피라냐 요리를 낼 때는 진짜 피라냐를 세 번씩 데쳐 얼려 만든 접시 위에 요리를 올립니다. 재료끼리 조합이 잘 맞는다고 해서 요리로 만들지 않아요. 같은 고도의 같은 생태계에서 자라난 재료들로만 한 접시를 완성한다는 게 철칙입니다. 먹으면 그곳을 여행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페루인의 소울 푸드 세비체 ⓒAPEGA

페루인의 소울 푸드 세비체 ⓒAPEGA

남미 최대 미식 축제 ‘미스투라’ ⓒAPEGA

남미 최대 미식 축제 ‘미스투라’ ⓒAPEGA

‘미스투라’에서 만난 소 심장 구이‘안티쿠초’ ⓒAPEGA

‘미스투라’에서 만난 소 심장 구이‘안티쿠초’ ⓒAPEGA

 페루가 원래 풍요로웠던 땅이라지만, 정복의 역사는 요리의 다양성에 불을 지폈다. 페루 전통의 맛을 ‘얽힌 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루요리협회(APEGA)가 주관하는 미식 축제 ‘미스투라(Mistura)’는 페루 전 지역의 음식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이다. 올해 10회를 맞아 리마의 역사지구인 ’리막(Rimac)‘에서 열린 행사에는 총 200여 개의 식당 부스가 세워졌다.

가장 많은 부스를 차지한 음식은 역시 ‘세비체(Ceviche)’다. 원조 퓨전요리이기도 하다. 날생선에 라임ㆍ레몬 등의 소스를 자작하게 붓고 양파와 고수, 삶은 옥수수 알 등을 버무린 음식이다. 우리 물회랑 비슷한데 맵지 않고 더 새콤하다. 원래 해안가 원주민의 음식이었지만 스페인 정복자가 들여온 라임과 결합해 오늘날 버전으로 완성됐다.

페루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 ‘안티쿠초(Anticuchoㆍ소 심장 꼬치구이)’에도 이주민의 역사가 담겨 있다. 스페인 정복 이후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온 아프리카 노예들이 먹던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소의 살코기는 지배자인 스페인인의 몫이었고, 나머지 부속고기는 피지배자인 페루인과 노예들에게 돌아갔다. 그런데도 맛있다. 철판에 한바탕 불 쇼와 함께 구워진 심장 꼬치구이에 매콤한 칠리소스를 뿌려 먹는다. 쫄깃하게 씹히면서 불맛 가득 배인 소고기 같다.

쌀은 노예제 폐지 이후 밀려들어 온 중국인 노동자가 전파했다. 이들이 전파한 중국 음식은 퓨전 음식에 머물지 않고 ‘치파(Chifa)’라는 새로운 음식 장르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닛케이 퀴진(Nikkei Cuisine)’으로 자리 잡은 일본 음식도 마찬가지다. 올해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8위를 차지한 ‘마이도’는 페루 ‘닛케이 퀴진(Nikkei Cuisine)’의 대명사다. 이곳의 오너셰프이자 일본계 페루인인 미츠하루 쓰무라(Mitsuharu Tsumuraㆍ36)는 “나는 페루에서 일본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 일본의 영향을 받은 페루 음식을 만들고 있다”고 자신의 요리 철학을 설명했다.

이처럼 페루의 맛은 유연하고, 다양하다. 퓨전으로 한 데 묶지 않고, 각각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니 페루에 가면 이 얽힌 요리 생태계부터 한 입 베어먹어야 한다. 도착하자마자 단호하게 외칠 필요가 있겠다. 마추픽추도 식후경!

리마(페루) 글·사진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페루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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