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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공부] 조광조의 과거시험 답안 "임금은 덕으로 다스리고 솔선수범 보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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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큰별쌤’ 최태성 한국사 NIE

최종 응시자에게 임금이 직접 질문한 과거시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국에서 수능은 시험 당일엔 비행기 이착륙도 시험 시간을 피해 조정해야 할 정도로 민감한 관심사입니다. 얼마 전 ‘수능 개편’ 논의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시험은 늘 ‘뜨거운 감자’인데요. 혹자는 대입 시험의 이상적 모습과 관련해 “수험생 사이에서 분명하게 점수가 갈리는 형태의 객관적 시험을 통해 대학 신입생을 뽑는 게 공정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답을 골라내는 형태의 시험으로는 학생의 역량을 파악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인재를 선발하는 일은 선조들에게도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어떤 시험이었을까요. 지금과 같은 객관식은 아니었지요. 이번 주 역사 NIE는 조선시대 과거제를 살폈습니다.

지난 9월 서울 경희궁 숭정전 앞에서 열린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행사'에서 응시생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고 있다. [뉴스1]

지난 9월 서울 경희궁 숭정전 앞에서 열린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행사'에서 응시생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고 있다. [뉴스1]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11월 16일)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수험생들은 긴장 속에 마무리 학습에 여념이 없다. 수능을 출제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능의 성격과 목적에 대해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학능력을 측정하고 선발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한다’고 밝히고 있다.

수능 앞두고 돌아본 조선 과거시험 #마지막 관문은 임금이 문제 출제 #성삼문 "정치 근본은 마음" 원칙론 #신숙주 "창업·수성은 달라" 현실론 #정약용, 관행 깬 '파격' 글쓰기 답안 #임금·신하가 미래 설계 기회로 활용

우리 선조들 역시 공정하고 객관적 방식으로 인재를 선발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인 제도가 과거시험이다. 과거시험은 오늘날로 치면 수능에 해당하는 ‘소과’, 각종 고시와 비슷한 ‘대과’로 나뉘었다. 소과에 붙으면 지금의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을 얻었다. 대과는 관직을 얻는 시험이었다.

조선시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는 대부분 대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소과만 붙고도 나라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위치에 오른 이도 있다. 주자학 대가이자 노론의 영수(領袖, 여러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인 우암 송시열(1607~89)이다. 그는 스물여섯 나이인 인조 11년(1633) 소과에 응시했다. 이때 나온 문제는 주역에 나오는 구절인 ‘하나의 음(陰)과 하나의 양(陽)이 순환해 움직이는 것을 도(道)라 이른다’에 대해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태극과 음양의 이치는 천지조화의 근원이며 사람의 행동과 말은 마음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 마음을 수양해 그 마음이 늘 자신의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답안을 적어 장원급제했다.

이처럼 소과에선 『대학』 『논어』 『맹자』 『중용』등 사서(四書), 예기·춘추·시·서·역 등 오경(五經, 유학의 다섯 가지 경서)의 내용을 토대로 응시자의 가치관과 철학을 논하는 문제가 주로 나왔다.

지난달 제주시에서 초등학생들이 과거시험을 재현했다. [연합뉴스]

지난달 제주시에서 초등학생들이 과거시험을 재현했다. [연합뉴스]

대과는 초시·복시·전시 등 세 단계로 진행됐다. 예비고사 격인 초시에선 모두 240명을 뽑았다. 지역할당제 성격으로 지방 유생이 치르는 ‘향시’에서 150명, 서울 사는 유생이 보는 ‘한성시’에서 40명, 성균관 유생이 보는 ‘관시’에서 50명을 선발했다. 초시에 붙으면 본고사 격인 복시를 봤다. 여기에서 33명을 최종 선발했다. 초시·복시에선 경학(經學, 유가 경전을 연구해 주석을 달거나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밝히는 학문)에 대한 이해나 시 짓기, 논술 능력을 평가했다.

복시 합격자 33명은 마지막 관문인 전시를 치르게 해 이들의 순위를 결정했다. 전시는 임금이 직접 문제를 냈다. 정국 현안에 대한 이해와 해결 능력을 평가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전시는 과거시험의 ‘꽃’이라 할 만했다. 전시 답안지에는 왕의 질문에 당당히 답하는 예비 관료들의 패기가 읽혔다. 또 입직 이후 어떤 정치를 펼칠 것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도 많았다. 이런 사례 중 하나가 유교적 이상주의자, 원칙론자로 불리는 개혁정치가 조광조(1482~1519)다.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 시절인 중종 10년(1515) 알성시를 봤다. 알성시는 성균관 유생만을 대상으로 초시·복시 없이 전시만 치러 관직에 오를 인재를 발탁하는 시험이었다. 중종은 이 시험에서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떠한 정치를 해야 하는지 답하라’는 문제를 냈다.

조광조는 답안지에 이렇게 썼다. "임금은 진심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는 정책을 펴야 하고 또한 대신을 믿고 조정의 신료들과 함께 국사를 처리하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이 스스로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조광조는 이 시험에서 ‘장원’(1등), ‘갑과’(2등) 다음인 ‘을과’를 했다. 관직에 오른 조광조는 "군주는 철인(哲人, 학식이 높은 사람)이 돼야 한다”며 완벽한 도덕 군주가 될 것을 중종에게 강조했다. 당시 중종은 훈구파를 견제하며 왕권 강화를 꿈꾸고 있었다. 조광조는 이런 중종에게 "국사를 조정의 신료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 사회로 만드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런 조광조의 모습은 그의 답안에 담겨 있었던 셈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응시자가 낸 답안지. 오른쪽 상단에 이름·나이·본관은 물론 증조와 외조의 직함 등도 적어 냈다. [사진 함양박물관]

조선시대 과거시험 응시자가 낸 답안지. 오른쪽 상단에 이름·나이·본관은 물론 증조와 외조의 직함 등도 적어 냈다. [사진 함양박물관]

성삼문(1418~56)과 신숙주(1417~75)는 세종 29년(1447) 나란히 대과에 응시해 각각 장원(1등)·을과(3등)로 급제했다. 둘은 훗날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우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자 수양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이런 격변기에 성삼문·신숙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성삼문은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목숨을 잃는 사육신의 길을 택했다. 신숙주는 세조와 손잡고 화려한 출세를 거듭했다. 이 둘이 걷게 될 인생은 그들이 전시에 낸 답안지에 이미 암시돼 있었다. 당시 전시에서 세종이 낸 문제는 ‘법이 제정되면 폐단도 함께 발생하는데 이를 해결할 대책을 답하라’였다.

여기에 대해 성삼문은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고, 법은 정치의 도구’라는 글귀를 인용하며 ‘임금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을 줄 모르고, 도구에 불과한 법에만 의지해 정치하면 폐단이 생긴다’고 적었다. 법의 폐단이 발생하는 이유를 ‘임금이 정치의 근본인 마음부터 살펴야 하는데 정치의 도구인 법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원칙론을 제시한 것이다.

신숙주의 답안은 전혀 달랐다. 그는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은 형세가 다르다. 창업 때의 정치는 시의를 참작해 손익을 헤아려 폐단을 구제하는 데 목적이 있고, 수성 때의 정치는 옛 법을 좇아 조심스럽게 지켜서 폐단을 구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적었다. ‘창업과 수성의 형세는 다르다’며 ‘시기에 맞는 정치가 따로 있다’고 답한 것이다. 비슷한 길을 걷던 두 학자가 정반대의 선택을 한 연유를 이들의 답안에서 찾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번뜩이는 천재성이 읽히는 답안도 있다. 정조 13년(1789) 전시에 응시한 정약용의 답안이다. 정조가 낸 문제는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이었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재상 집에 묵고 있는 다섯 나그네에 대한 이야기를 창작해 답안을 써내려 갔다. 재상이 나그네의 재주를 파악해 적재적소에 맞춰 쓰듯 신하의 재능과 장단점을 파악하는 것이 인재 등용의 핵심이라는 내용의 답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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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답안은 파격적인 글쓰기였다. 당시 답안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만큼 형식이 정형화돼 있었다. 갑과(2등)로 합격한 정약용은 거중기를 개발하고 수원화성을 설계했으며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등 과학기술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인 정약용의 천재성은 그의 답안에서 이미 엿보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임금은 과거시험에서 자신의 고민을 젊은 인재들에게 물었다. 인재들은 앞으로 조선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에 대한 포부를 답안지에 담았다. 과거시험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기회였다.

지금 한국은 수능과 공무원시험, 각종 고시 등에 사람이 몰려 ‘시험 공화국’이라 불린다. 초등학생·중학생도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선행학습과 사교육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험을 통해 어떤 인재를 선발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일이다.

최태성 한국사 강사
정리=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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