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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은 보수까지 힘 보태 … 양손 민주주의의 결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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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적폐란 용어는 없던 갈등도 만든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적폐란 용어는 없던 갈등도 만든다“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23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정치발전소에서 정치학자 박상훈(53) 학교장을 만났다. 『정치의 발견』, 최장집 교수와의 공저 『양손잡이 민주주의』 등을 펴낸 정치학자다. ‘촛불 1주년’을 맞아 그에게 촛불의 정치사회사적 의미와 계승에 대해 물었다.

촛불정신은 협치로 이어져야 #환호나 받으려고 하면 안 돼 #적폐청산 내걸면 토론·협의 불가능 #없던 갈등도 만드는 비민주적 말 #대통령 지지 안한 59% 시민 있어 #국가지도자보다 정치지도자 돼야

‘촛불 정국’ 1주년이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서도 큰 사건이었다. 큰 사건은 시간이 지나서 먼지가 좀 가라앉아야 잘 보인다. ‘2016년 촛불 정국’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대신 나는 촛불 정국에서 회자됐던 ‘나라’라는 말에 주목한다.”
어떤 ‘나라’를 말하나.
“촛불을 든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 ‘이게 나라냐?’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 사실 ‘나라’는 정치학적으로 볼 때 특별한 말이다. 예전에는 민족주의의 용어였다. 촛불집회에서는 민주주의 용어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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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용어로서 ‘나라’의 의미는.
“주부들이 육아와 가사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향유할 수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도 안정되게 일할 수 있고, 젊은 학생들의 일자리가 해결되는 삶. 그런 자유롭고 평등한 삶의 가치를 ‘나라’라는 말로 대신 표현했다. 그게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30년간 품고 있던 ‘실현되지 않은 약속’에 대한 요구라고 본다. 촛불 광장은 그 약속을 집약해 요구한 장이었다.”

박상훈 학교장은 ‘촛불 정국’을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두 가지 시각을 설명했다. “하나는 ‘적폐청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협치를 통한 변화’다. 이 둘은 서로 충돌한다.”

광화문 촛불 집회. [뉴시스]

광화문 촛불 집회. [뉴시스]

‘촛불 정국’ 해석이 왜 둘로 갈리나.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더 과감한 변화를 원한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적폐청산’이나 ‘구체제에 대한 변혁’을 내걸고 강한 드라이브를 건다. 또 다른 쪽에서는 ‘적폐청산’이나 ‘양극화된 대립적 갈등구조’를 바라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오히려 ‘촛불’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양손잡이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양손잡이 민주주의’라면.
“대통령 탄핵은 진보 정당만의 힘으론 통과될 수 없었다. 친박을 제외한 보수가 힘을 합했기에 가능했다. 사실상 ‘촛불’은 그러한 사회적 대연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왼손과 오른손이 힘을 합했다. 그게 ‘양손잡이 민주주의’다. 그러니 정치도 거기에 부합해 협치(協治)와 협력적 변화를 모색해 가라는 요구다.”
‘촛불’ 직후에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을 전후해 두 가지를 강조했다. ‘적폐청산’과 ‘통합대통령’이다. 그런데 요즘은 누가 보더라도 ‘적폐청산’이 주(主)가 됐다. ‘통합대통령’은 특정 상황의 논리에 따라 알맹이 없는 말이 돼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혹자는 문 대통령이 극렬 지지자들의 요구를 따라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다.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서 하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박상훈 학교장은 ‘적폐청산’이 옛날부터 쓰였던 말이 아니라고 했다. “‘적폐’라는 말은 구한말 때 언론을 봐도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다. 박정희 시대 때 ‘구악일소(舊惡一掃)’라는 말을 썼고, 김영삼 정부에서 사정개혁을 할 때 ‘적폐청산’을 부분적으로 썼다. 이 용어를 광범위하게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건 박근혜 정부였다. 야당과 국회가 본인이 기대하는 개혁입법을 잘 해주지 않자 ‘좌익정권 10년 적폐청산론’을 많이 거론했다. 그때 비로소 ‘적폐’가 본격적인 정치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박 학교장은 ‘적폐청산’이 “민주주의 용어가 아니라 유사 공안 담론의 용어”라고 지적했다.

‘적폐청산’이 왜 민주주의 용어가 아닌가.
“가령 남북 문제에 있어 ‘대북포용’과 ‘안보우선’으로 찬반이 갈릴 수 있다. 그래서 토론과 협의가 가능하다. 그게 민주주의다. 그런데 ‘적폐청산’에 맞선 ‘반(反)적폐청산’이 있을 수 있나. 한쪽에서 ‘적폐청산’을 내걸면 토론과 협의는 이미 불가능해진다.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는 전적으로 처벌과 청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폐청산’은 오히려 반공주의의 변형 형태에 가깝다. 그건 권위주의에는 맞지만 민주주의에는 맞지 않는 방식이다.”
그래도 과거의 폐단을 해결하고 나아가야 하지 않나.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 ‘국정원 적폐’ 대신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민간인 사찰 방지 대책마련’이라고 명패를 붙이면 된다. 그럼 여야 간 토론과 합의가 가능해진다. 사안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갈등 쟁점이 되기도 하고, 합의 쟁점이 되기도 한다. 정치란 눈앞에 있는 갈등도 합의로 풀어가는 일이다. 그런데 ‘적폐청산’은 없던 갈등마저 만들어내는 말이다.”
통합대통령이 왜 중요한가.
“촛불집회의 최고 계승자는 정치일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그게 ‘협치’라는 말로 표현됐다. 모든 정치인이 ‘협치하겠다’고 했다. 그건 촛불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다. 그래서 통합대통령이 중요하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59%의 시민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 위에 선 국가지도자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대통령이 외교 관계에서는 국가지도자지만, 대내적으로는 정치지도자가 돼야 한다.”
정치지도자가 된다는 건.
“야당과 대화하고 타협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의회나 정당 바깥에서 시민사회의 환호를 받는 식으로 정치를 하려는 건 되짚어 볼 일이다. 정치에서는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옳음을 나누어 갖고 있다. 성장에 대한 관점도, 복지에 대한 관점도 옳음을 나누어 갖고 있다. 이견(異見)을 통해, 또 고통스럽지만 협력을 통해 서로의 옳음을 배워가는 과정이 협치다. 그럴 때 양손잡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그걸 통해 성숙한다. 나는 거기에 진정한 촛불정신의 계승이 있다고 본다.”

◆박상훈

충남 청양 출생. 서울대 경영학과, 고려대 정치학과 박사.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역임. 현재 정치발전소 학교장. 『정치의 발견』 『민주주의의 재발견』 등.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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