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법원장 발언, 재판권 침해 우려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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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용훈 대법원장이 최근 일부 법관에게 특정 사건의 재판 결과를 언급하면서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 대법원장은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한 10여 명과의 만찬 자리에서 "두산 비자금 사건 판결이 국민의 법원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얼마 전 1심 법원이 회사 돈 280여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두산그룹 오너 3형제 등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데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법부 수장이 구체적 사건을 지칭해 양형을 비판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 대법원장의 지적대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던 판결이 적지 않았다. 또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판결로 끊임없이 재판 결과에 형평성 문제가 제기됐던 것도 사실이다. 오죽하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따라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법부의 자기 반성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재판권까지 침해해선 곤란하다.

이 대법원장의 발언은 두산 사건의 경우 2, 3심 재판을 남겨놓고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대법원장의 의중이 드러난 마당에 상급심 재판부가 과연 자유롭게 심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재판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법관은 오로지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고 헌법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법원장이 1억원어치의 물건을 훔친 사람과 200억원, 300억원을 횡령한 사람을 비교해 양형의 형평성을 지적한 것도 지나치다. 범행 동기나 수단, 피해자에 대한 관계, 피해 회복 여부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범행 액수만을 기준으로 양형을 정한다면 또 다른 형평성 시비를 불러올 수 있고, 법관의 재량권을 침해하게 된다.

대법원장이 재판 중인 사건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법관의 재판권은 외부 권력이든, 사법부 내든 누구도 침해해선 안 된다. 그것이 사법권 독립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