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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받은 ‘36.5℃ 인간의 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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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36.5℃ 인간의 경제학.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2009년 발간한 행동경제학 소개서에 붙인 이름이다. 왜 행동경제학이 인간의 경제학이란 걸까. 경제학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상정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무엇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또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움직인다. “정육점·양조장·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에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의 이득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썼던 이 유명한 말처럼 말이다.

합리성·이기심만으로 설명 못하는 게 우리네 인간 #‘조용한 혁명가’였던 세일러의 ‘넛지’에서 배워야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의 아버지’ 리처드 세일러는 2008년 공저 『넛지』에서 기존 경제학에 이런 야유를 보냈다. “경제학 교과서를 보면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아인슈타인처럼 생각할 줄 알고, IBM의 빅 블루에 해당하는 기억 용량을 갖고 있으며, 간디 같은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행동경제학은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그다지 합리적이지도, 언제나 이기적인 것도 아니라고 본다. 지금, 여기에서 당장 우리 주위에 있는 36.5도의 온기를 지닌 보통 사람들을 보면 아인슈타인도 간디도 못 된다. 197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은 인간의 인지능력과 정보·지식의 한계 때문에 제한된 합리성만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은 한발 더 나아갔다. 모든 정보를 활용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건 매우 어렵다. 아무리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가 화두인 세상이라지만 우리의 일상은 어림짐작이나 주먹구구식으로 결정하거나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 판단하는 게 보통이다. 이득보다 손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손에 쥔 걸 내놓기 싫어한다.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 ‘거위에게서 고통 없이 털을 뽑는’ 세제개편안을 선보였다가 역풍을 맞은 것도 이런 점을 사려 깊게 감안하지 못한 탓이다. 실제 사람들은 애써 뭔가를 바꾸는 것보다 현상 유지를 좋아한다. 귀찮거나 변화가 두려워서다. 그래서 처음 상태인 ‘디폴트’를 어떻게 정해 놓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네 인간이 이기심만 좇는 게 아니라 공정성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실험으로 보여줬다.

『넛지』는 국내에서 40만 권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다. 내용도 참신했지만 2009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휴가를 가면서 참모들에게 추천한 덕도 봤다. 넛지(Nudge)는 팔꿈치로 옆구리를 슬쩍 찌르는 것 같은 부드러운 개입을 말한다. 지시나 명령, 금지가 아닌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다. 그런 MB 정부에서 ‘넛지’하는 대신 경제부처들이 총동원돼 기업을 압박하며 물가와의 전쟁을 벌였다는 건 아이러니다.

외신을 읽다가 세일러를 ‘알아서 자중했던 혁명가(consciously quiet revolutionary)’라고 표현한 글에 눈길이 갔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세일러 같은 주장은 경제학계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그게 심리학이지 무슨 경제학이냐”라는 비아냥을 듣기 십상이었다. ‘사회과학의 여왕’이라는 자부심 가득한 경제학계에서 이단(異端) 같은 존재였다. 세일러는 기존 학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신, 논문과 대중서적으로 대학원생 같은 젊은 층을 파고들었다. 세월이 흘러 그때의 대학원생들은 행동경제학 연구자가 됐다. 행동경제학은 아직 주류는 아니지만 서너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학계에서 존중받는 위치에 올랐다.

세일러의 ‘조용한 혁명’을 청와대도 참고했으면 한다.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는 방식의 개혁은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뿐더러 상대방이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남자화장실 소변기 앞에 ‘한 발 앞으로’ ‘정조준하시오’ 같은 명령조 문구를 붙이는 것보다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처럼 파리 한 마리 그려넣는 게 더 효과적이라지 않나. 적폐청산도 세일러에게 배울 부분이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