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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개죽음’ 45년, 유신 대못 4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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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용호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

“군에서 죽으면 개죽음”이라고들 한다. 이 말엔 사연이 있다. 베트남 전쟁 때였다. 1965년, 파병이 결정된다. 죽거나 다친 젊은이가 많았다. 국가는 법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했다. 보상금 외에 소송을 통해 배상을 청구하면 배상금도 줘야 했다. 전사나 부상 정도에 따라 배상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보상금보다 배상금이 많다. 하지만 나라는 이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67년 국가배상법은 군인은 보상만 받고 배상 청구는 못하게 했다. 어처구니없는 이 법이 ‘개죽음’이란 말을 낳았다.

위헌 독소조항 유신 당시 헌법 돼 지금까지 #디지털 시대 맞아 내 삶 바꾸는 개헌 꼭 해야

논란이 되자 대법원이 71년 위헌 여부를 들여다봤다. 헌법재판소가 생기기 전이다. 서슬 퍼런 그때도 위헌이라 결정했다. 파격적 판결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격노했다. 대법관들이 법복을 벗었다.

72년 유신 헌법은 모든 걸 정리한다. ‘이중배상 금지’를 법률이 아니라 헌법에 넣었다. 경찰도 추가됐다. 이 조항의 헌법 명시는 ‘변경 불가’란 대못을 박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듬해엔 예비군까지 대상에 들어갔다. 87년 개헌 때 당연히 논란이 됐다. 하지만 직선제 논의에 묻혀 독소 조항은 그대로 살았다. 그게 45년째 존속하는 헌법 제29조 2항이다. 현행 헌법은 위헌 요소를 안고 있는 모순 헌법이기도 하다.

지난해 8월 휴전선 DMZ에서 목함지뢰 도발 사건이 있었다. 두 병사의 다리가 절단됐다. 한데 둘이 민간병원에서 자비로 치료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공분이 일었다. 군인의 민간병원 입원이 30일을 넘기면 각자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법 때문이었다. 독소 조항이 영향을 미친 폐해다.

2015년 5월엔 서울의 한 예비군 사격장에서 총기 사고가 있었다. 한 예비군이 총탄 7발을 난사한 뒤 자살했다. 다른 두 명이 사망했고 두 명은 부상당했다. 통제 요원을 제대로 배치하지 않은 군 당국의 잘못이 드러났다. 그래도 국가배상 청구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역시 헌법 29조 2항 때문이었다.

그동안 독소 조항을 없애려는 시도는 있었다. 헌법재판소가 생긴 후 1995년 등 세 차례 심사를 했다. 하지만 “헌법 조항을 대상으로 한 헌법소원심판청구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났다. 헌법이 헌법을 판단하지 못한다는 점을 노린 ‘유신 대못’ 탓에 없앨 수가 없었다.

흔히 개헌 하면 “대통령 중심제냐, 이원집정부제냐” 하는 권력구조 문제가 최대 쟁점이다. 하지만 지금 헌법에는 시대에 맞지 않는 심각한 모순과 문제점이 한둘 아니다. 중앙일보 창간 52주년 기획 ‘리셋 코리아-내 삶을 바꾸는 개헌’에서 그 필요성을 환기시킨 것도 그 때문이다.

‘87년 헌법’에는 온라인 관련 조항이 아예 없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언론 자유의 기본인 알 권리 역시 없다. 국가가 갑이고 국민은 시혜의 대상이란 인식도 여전하다. 그나마 ‘경제민주화’ 조항이 있어 갑질을 막을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거라도 없었다면 어찌 됐을까. 헌법학자들은 헌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근거로 이 조항을 사례로 들 정도다.

이렇게 절실한 개헌이 내년 6월엔 가능할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말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가 “참 나쁜 대통령”이란 소릴 듣고 접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집권 3년차에 개헌을 공론화했지만 실패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개헌 의지를 밝혔지만 그날 저녁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보도’로 동력을 상실했다. 딱 10시간 만이었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게 개헌이다. 이번엔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 국민투표를 약속해 어느 때보다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6·25 전쟁 이래 최악이라는 북핵 위기로 모두가 거기만 쳐다보고 있다. 게다가 정치권은 적폐 청산 전쟁에 여념이 없다. 위태롭고 한심한 상황이다. 이러다 자칫 개헌 논의가 뒤로 밀리는 건 아닌지, 이런 정치권 수준으로 제대로 된 헌법을 가질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개헌은 더 미룰 수 없는 시대 소명이다. 개헌 없는 내년 6월은 ‘미래를 저버리는 일’이란 것을 정치권은 명심해야 한다.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